또 모를 일
건축가 선언
벌써 세 번째. 이쯤 되면 선언에 가깝다.
일요일 오전, 홀로 조용히 사무실 난에 물을 주며 몇 년 만에 핀 난꽃을 즐기는데, 교회를 다녀온 둘째와 셋째가 들이닥친다. 이건 뭐고, 저건 어디에 쓰는 물건이냐며 오랜만에 행차하신 사무실 구석구석을 뒤지며 내 정신을 헤집어 놓는다. 멀찍이 떨어져 자연스럽게 대형 모니터 앞에 자리를 차지한 누나 몰래 막내가 또다시 선전포고한다.
“나 이거 할래.”
“이게 뭐야?”
“이거, 건축. 나 어른 되면 이거 할래.”
실은 대부분의 선전포고는 전조증상으로 인해 그닥 충격적이지 않다. 5살 된 아이 입에서 본인의 꿈이 수줍게 새어 나올 때, ‘올 것이 왔구나.’라며 덜컥 마음이 내려앉더니 세 번째쯤 되니 이제는 아이도 나도 서로 무심하고 담담한 것이 무릇 성인들의 대화에 가깝다.
‘그래. 잘해봐라. 나도 이 일을 정말 좋아했었다. 지금도 좋아는 한다.’ 혼잣말을 뱉어내고 뒤돌아 서 짧은 기도문을 외운다.
‘또 모를 일이다. 너나 나나.’
벼리에 대하여
‘벼리’라는 말은 그물의 코를 꿰어 그물을 잡아당기거나 놓아 풀 수 있게 한 동아줄을 말한다. 예문으로는 ‘마치 투망으로 고기를 싸 놓은 꼴이 아니고 뭐냐? 이렇게 싸 놓은 고기라면 벼리 당기는 일만 남았는데……’를 들 수 있겠다. 이와 달리 일이나 글의 뼈대가 되는 줄거리를 뜻하기도 한다. 나아가 단어의 자의(字意)는 그물이 벼리를 이탈할 수 없듯이 인간이 필수적으로 지켜야 할 기본적인 도덕과 규범을 뜻하기도 한다. 망망대해에서 그물코의 성글지 못함보다, 굼실대는 물결의 일렁임보다, 내 기필코 잡아채려는 정어리보다 중한 건 ‘벼리’를 가늠하는 것이다.
한여름 무더위를 견뎌내면서도 격(格)을 지키고자 한 우리네 조상은 무척이나 지혜롭다. 늘쩍지근한 한복과 끈적끈적한 살갗에 바람길을 열어두려 등등거리를 즐겨 착용했다고 한다. 이 또한 매듭 있는 그물과 유사하여 엉켜있는 그물보다 단단한 테두리에 의해 그 형상과 쓰임이 결정된다. 이렇듯 막연한 무언가를 건져 올리는 일과 구체적인 형상의 정확한 간극을 비워두는 일의 근본되는 이치는 동일하다. 가늠할 수 있는 테두리를 세우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 정해진 규격의 한코 한코를 꿰어가며 테두리에 이르러 맞춰 변형시키는 것이다.
작업을 함에 있어 ‘테두리’의 막연함을 논한 안종진 소장의 발제에 화답으로 시작된 글이니, 덧붙여 약간의 오지랖을 늘어놓아야겠다. 언제 적 천사이고, 언제 적 미래와 역사이고, 언제 적 진보와 폭풍이며, 언제 적 고뇌와 우수인가? 그때로부터 100년이 지났건만 우리는 아직도 중심의 상실에 망연자실하고 있는가? 본디 중심은 부재했다! 아니, 모든 곳이 중심이다. 함께 ‘이곳, 이 땅’의 현실에 발붙여 우리 이야기로 살아내기를 노력하세. 곁에 둔 일상을, 궤도를, 형식을, 구속을 살아내지 않고서는 그 어떤 변화와 변혁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는 알잖는가? 다시, 문제는 리얼리즘일 뿐이다. 달걀 속의 들끓는 고요가 없이 어떻게 닭이 소리쳐 신새벽을 알릴 수 있단 말인가.

말의 난장(亂場)에서
그간 작업을 핑계로 돌아보지 못한 다양한 자리에 나를 앉혀보고 있다. 무엇의 구상과는 일정한 거리를 둔 그곳은 난무하는 ‘말’과의 다툼이고 또 화해의 장소이다. ‘그때의 말’이 ‘지금의 말’을 만나기도 하고, ‘지금의 말’이 ‘그때의 작업’을 포장하기도 하고, ‘그때의 작업과 주체’에 ‘지금의 말’을 붙이기도 한다. 특정 주제와 작업에 대한 해석은 모두에게 모든 순간 열려 있다.
1. ‘말’과 ‘말’이 만나는 곳
그야말로 난장이고, 자리다툼이다. 담론을 선점하기 위한 전장으로 오롯이 ‘그때 나의 말’을 전달하기에는 버겁다. 펼쳐져 있던 생각이 ‘각자의 지금 말’에 미끄러지기도 하고, 누군가에 의해 ‘선점된 혹은 선정된 ‘말’에 폭력적으로 포섭되기도 한다.
2. ‘말’과 ‘작업’이 만나는 곳
누군가의 작업에 스포트라이트가 비친다. 그러나 쏟아내는 ‘말’들 덕분에 핀 조명의 조도는 충분히 잦아들고, ‘작업’은 ‘말’의 호명에 따라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옮겨가며 본디 정해진 제 자리는 없음을 굳이 증명해 낸다.
3. ‘말’과 ‘작업 주체’가 만나는 곳
작업과 작업 주체를 구태여 분리할 필요가 있을까마는 창작의 과정과 내용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나온 사람들이 그 ‘작업’을 탐닉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상상된 imagined 작업자’를 불러내 ‘너의 자리는 거기가 아니라 여기가 아니냐?’라며 저기 눅진 곳으로 주체의 등을 떠민다.
이렇듯 ‘말의 난장’에서 벌어지는 세 가지 양태는 분리되기도 하고, 한자리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기도 한다. 글로 생각을 정리해 가는데 익숙한 나에게 이 중 가장 어렵고 난망한 것은 첫 번째 경우이다. ‘말’과 ‘말’로 점철된 사고(思考 또는 事故)의 전장에서 ‘글’의 리듬으로 대적함은 무기력하여 속사포 ‘말’들에 포위당해 끌려가든, 도망치듯 딴청 부려 잠시 다른 세계로 나를 피신시키기 십상이다.
‘말’의 부딪침은 모두가 이야기 나누며 담론을 형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지금 나에게 꼭 필요한 과정으로 보인다. 말의 농도와 강도를 조절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우선 ‘내 생각’을 분명히 하고 스스름없이 드러내는 것부터 시작이다. 글이 아닌 말로 대신하는 요령을 배워야겠다. 끝내 미끄러져 질문을 낳겠지만, 진정한 주체는 타자 속에 있다.
누구라도 불편한 세로쓰기
또 ‘새문서 만들기’를 클릭하고 잠시 망설인다. 명조와 고딕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가끔은 아주 가끔은 재기 발랄함을 보여주려 굴림을 고르는데 오늘은 세로쓰기 하나를 더한다. 텍스트를 상징하는 ‘T 아이콘’을 살펴보니 아래로 향하는 화살표(↓)와 나란히 쓰인 ‘T’를 발견할 수 있다. 한자씩 조심히 써 내려가니 한글의 자음과 모음은 그나마 자연스러운데 문장부호와 알파벳은 어찌할 바를 모르며 춤을 춘다. 더욱 난감한 것은 커서와 엔터, 백스페이스의 예상치 못한 움직임인데 이를 따라야 하는 나는 마치 이집트 상형문자를 쓰고 있는 듯한 생경함에 멀미가 인다. 머리로 뜻을 읽어내지 못함은 물론이거니와 두 눈 또한 글을 가로질러 연속된 선형으로 움직이지 못하고 그림을 보듯 부분 부분의 파편에 초점을 맞추려 하지만 글이라는 것이 대단히 분명한 시각적 의도가 있는 것도 아니기에 구석구석을 정처 없이 헤집고 돌아다닐 뿐이다. 글은 우상에서 좌하로 채워져 가는데, 나의 눈은 자꾸만 비워진 좌상에서 시작해 어그적 어그적 우하로 움직인다. 사정이 이러하니 명조는 고사하고 세로쓰기에는 애당초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것이구나. 더하여 한가지 깨달음에 이르니 ‘아~ 이래서 선조의 옛글은 줄을 따라 논리에 순서를 더해가며 사고를 지글지글 끌고 갔던 게로구나’.
이와 같은 불편함이 나의 ‘화두’가 되어야겠다. 우선 나의 관심은 전통도 아니고, 정체성도 아니고, 독창성도 아님을 밝히려 한다. 이는 불필요한 논쟁을 줄이기 위함으로 탈식민지도 아니고, 동아시아 근대화도 아니고, 건축보다 대단한 영조에 관한 관심도 아니다. 콘크리트로 목구조 지붕과 결구를 흉내 내기 위함도 아니고, 고상한 정신을 담아 현대적 재해석을 해보고 싶음도 아니고, 비워냄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적 채움도 아니고, 적절한 크기로 나눈 것을 채와 켜로 둘러대려 함도 아니고, 풍경 좋은 곳을 향한 창에 차경과 장경을 덧씌우기 위함도 아니다. 또한 그간의 오고 간 말들로 피투성이가 된 ‘한국적임’이 어렵지만 피할 길 없으니, 길가에 난무한 지금의 여기저기를 뽑기 놀이하듯 그중에도 극히 일부가 혹은 그 한 조각이 마치 우리의 진정한 현재로 한국성의 대안임을 주장하려는 바는 더더욱 아니고, 이도저도 버거운 와중인데 바야흐로 이제는 목구조의 시대가 왔다 하여 재료와 구조의 근친성에 기대어 거리낌 없이 직설적으로 옮겨보려는 욕망은 더더욱 아니다.
아닌 것은 제외하고, 원래 쓰려했던 명조로 글을 매듭지어보자. 건축이 한 사회의 생산과 소비 활동이 추동시킨 문화적 산물이라면, 나에게 필요한 ‘한국성’은 건축산업에서 여집합으로 남겨져 있을 것이고, 건축계가 여태껏 주장하고 논의해 온 것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둔 어딘가에 차집합으로 비어 있을 것이라 믿는다. 다만 나는 명조를 명조답게 써 내려갈 때 논리적인 사고가 가능해져 이를 통해 생산적 일조를 하게 되길 바랄 뿐이다. 그리고 그 과정이 공동체에서 논의되고 결과물로도 이해되는 모종의 형식으로 자리 잡길 기대할 따름이다. 그리하여 우리 건축이 지구 문명 안에서 분명한 교집합을 이룰 수 있다면 나조차도 불편한 세로쓰기를 해야만 하는 지금의 심리적 부담과 답답함을 편히 내려놓고 다시 가로쓰기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겠다. 세로쓰기가 새로 쓰기보다 어려울게다. 누구라도 그럴게다.

자기의 게임
특강을 요청한 이화여대 이윤희 교수의 요청은 단순했다.
‘정해진 형식은 없지만, 추구하는 이상적인 건축 방향을 학생 때 어떻게 정해서 navigate를 했는지, 꾸밈에 편중된 학생들에게 만들어지는 것에 대한 탐구에 관해서도 이야기해 주길.’
막막함과 함께 강연 자격에 대한 자문.
솔직해지려는 안이함과 정돈된 나를 찾아볼 기회라는 욕심.
‘텍토닉’이라는 굴레.
바슐라르의 격언.
earthwork과 roofwork의 유혹
목구조의 필연성.
상황을 헤쳐간 과정과 나열식 구성의 식상함.
학교의 홈페이지를 뒤지며 교수진의 구성과 이전 특강자의 면면을 살펴본다. ‘나와는 결이 다르구나.’ 작지만 중요한 무엇에 포커싱된 사진과 매력적인 경력으로 채워져 있구나. 삶의 궤적이 다르다. 대체 나는 어떤 길을 걸어온 것인가? 왜, 어찌하여 여기에 당도했는가! 산산조각 난 생각의 파편들에 잠 못 이루며 새벽 4시 사무실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있는가?
조각난 시간은 체화된 생각으로 이어져 흐리멍덩해진 지금의 나를 만들었구나. 깊숙이 나에게로 담가지고 나면 치유될 만큼의 생채기인가? 아니면 그 자체로 ‘나’라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두 페이지 낙서를 못 채우고 이내 다른 생각에 뒤척이는 건 일종의 병이다. ‘나’를 제쳐두고 주변과 조직을 걱정하는 오지랖으로 여기에 당도했으나, 나도 사무실도 뜬구름. 불안정한 자아는 아주 작은 파동에도 크게 요동친다. 어느덧 이 일 저 일 퉁겨지다 축 늘어진 몸과 마음이 더 편하게 느껴진다.
마흔이 넘은 지금에야 실어증을 겪게 된다. 그간 뱉어 온 말과 글은 무엇이며, 만들어낸 작업은 무슨 소용인가? 꽁꽁 숨어있는 저 깊숙한 곳 작은 돌멩이를 부여잡고 다시 우물 위로 올라와 거친 숨을 연거푸 뱉어 낼 수 있다면……. 그 작은 돌멩이 하나를 이제라도 찾고 싶다. 기워 올리자. 분명 작은 돌멩이 하나는 존재한다.
‘달의 행로를 바꿀지라도.’
사춘기를 준비하며
소솔 친구들께.
오랜만에 월간회의를 합니다. 올 상반기는 작년 에 시작된 서울(동대문)도서관의 안착과 협업을 통한 경쟁 공모 참가로 인해 예상하지 못했던 뜻밖의 부산한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정리된 글로 인사를 나누어야 하는데, 조각난 과정과 미처 마무리되지 않은 일들로 아직은 두서없는 상태이지만 생각과 소식을 전하려 합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고 또 예상과 계획보다는 과감한 실행과 공유가 중요한 시점이라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내년이면 소솔건축이 열 살이 됩니다. 지금 우리가 여타 사무실에 비해 재정적인 여유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지극히 한시적일 것입니다. 과연 ‘소솔이 지속 가능한 성장동력을 확보했는가?’라는 질문에는 외려 여느 사무실에 비해 빈약한 체질이라고 스스로 답하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한동안 이 문제에 집중하고 준비하는 시간을 보내려 합니다.
1. ㈜소솔건축사사무소, 법인으로 전환하겠습니다.
그동안 개인사업자로 운영하며, 여러 파트너와 함께 사무실의 재정을 유연하게 운영하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높은 세금부과율과 운영 기준의 불투명성 등 체질적인 한계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올 8월 안에 법인으로 전환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법인으로의 전환은 세금 문제로 인해 급하게 진행되겠지만, 여러분과 상의하고 요청하게 될 몇 가지 사안들(지출 및 업무 기준, 퇴직금의 정산 등)은 시간을 두고 논의하며 진행할 계획입니다. 건강한 운영체계를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2. 그동안의 작업을 정리하고, 마케팅 기반을 마련하겠습니다.
오랜 시간 다양한 작업을 진행해 왔지만, 극히 일부만을 정리하며 외부에 알려왔습니다. 그때문에 저희의 성과에 비해 인지도가 낮고 편중된 것이 사실입니다. 홈페이지를 재단장 하며 그동안의 작업을 정리하고, 퍼블리싱과 출품을 준비하겠습니다. 그리고 ‘2025년 젊은 건축가상’에 도전하겠습니다.
‘소솔의 색깔은 무엇이냐?’라는 물음에 즉답하는 걸 피해 왔습니다. 우선은 생존을 위해 어느 영역이든 뿌리내리는 것이 급선무였고, 여러 파트너와 스텝의 다양한 성향과 성장 방향을 열어 두려는 의도였습니다. 이제는 그동안의 작업을 정리하며, 우리가 함께 견지해야 할 몇 가지를 추려볼 생각입니다. ‘소솔의 색’을 선언하는 일은 더 늦추면 뚜렷한 우리 색을 추출하기에 점점 어려워질 것이라는 개인적인 판단입니다. 다소 무리하고 막연하지만, 사전에 공유하자면, ‘지금 여기 한국’과 ‘보편의 실험’(아직 적합한 단어를 찾지 못했습니다.)은 우리가 함께 성장하는 데 중요한 가치가 될 것 같습니다.
“우리가 건축적으로 뿌리내릴 토양은 어디이고, 나아가야 할 시장은 어디인가?”
두 가지 문제는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는 여전히 설계사무소로써 먹고 사는 일과 밀접하고, 앞으로의 시장을 내다보며 결정해야 하며, 스스로 또 다 같이 탐험하며 즐길 수 있을 만한 건축적 주제여야 하기에 조심스럽지만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일입니다. 시장과 호흡하며 소솔의 건축을 견지할 수 있는 마켓을 고민하고 작업을 통해 지속적으로 우리를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이는 마치 구석진 자리에 거미줄을 쳐 놓고, 먹이를 기다리는 거미의 생존 방식과 유사합니다. 자신을 어느 지점에 정박시켜 터를 닦는 것은 지난한 기다림의 연속으로 불확실함에서 오는 외로움과 때를 참고 기다려야 하는 배고픈 현실을 한동안 마주할 것이라 예상합니다. 다양한 색의 조합으로 덧칠되어, 예상을 넘어선 우리가 드러날 것이라는 믿음은 여전합니다. 정리되는 대로, 여러분과 이야기를 나누며 또 수정해 가겠습니다.
3. 진행 중인 프로젝트에 더 집중하겠습니다.
다수의 프로젝트가 현장에서 공사 중이고, 몇몇 프로젝트가 설계 납품을 앞두고 있습니다. 지난 1년 동안 저는 소장급 파트너가 PM으로 진행했던 프로젝트를 감리하며 현장에서 불거진 문제들을 파악하고 해결해 왔습니다. 반면 최근에는 여러분이 직접 PM이 되어 공들여 작업한 도서를 함께 검토합니다. 또 합사의 일원으로 묵묵히 우리 몫을 해내고 있는 친구들의 등을 다독이고 있습니다. 덕분에 아직은 부족하지만, 더 긍정적인 소솔의 미래를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요즘은 2020년에 시작해 이제서야 준공된 프로젝트들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아쉬움과 한계가 여실하지만, 그 과정에서 얻게 된 경험과 노하우가 축적됐고, 지금은 여러분의 작업이 빛날 수 있는 토대가 준비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마무리까지 집중해 주시길 부탁드리고, 앞으로도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마련하는 데 노력하겠습니다.
새벽에 뒤척이며 일어나 ‘오늘은 어설퍼도 생각을 나누어야지.’라고 결심하며 침대를 박차고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정신없이 써 내려간 긴 글 덕분에 깜박이는 커서의 압박에서 비교적 자유로워졌고, 이제야 여러분 각자의 고민을 거칠게 헤아려 봅니다. ^^
결혼을 앞둔 청년, 나는 누구 또 여긴 어디인지 살필 겨를도 없이 숨 가쁘게 달리는 청춘들, 긴 호흡을 마치고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는 이, 묵묵히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는 조력자, 막연한 즐거움에 몸을 맡긴 인턴……
그동안 잘해 오셨고, 또 아직은 불완전한 생(未生) 입니다.
다음 주에 있을 워크숍은 오롯이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편안한 시간을 보내시길, 덕분에 여유롭게 기다리며 서로를 지켜봐 줄 수 있는 계기가 되길, 그래서 함께 즐겁기를 기대합니다. 차분히 여행 준비하시고 과정 과정마다 웃으며 만납시다.
2024년 8월 12일
왕성한 드림.
소솔 3.0
소솔 2.0은 실패했습니다.
여러 HEAD에 의해 체계적으로 움직이는 조직을 꿈꿨습니다.
다양한 색깔이 덧칠해진 다채로운 작업을 꿈꿨습니다.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건축사무소를 꿈꿨습니다.
그래서 필요하다면 일량과 인원을 늘렸습니다.
허나, 왜 보통의 사무실들이 그렇게 운영되어 오는지.
왜 소솔의 지속이 그렇게 버거웠는지.
운 좋게도 적당한 시기를 견디며 배울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작은 청춘들의 소중한 마음이 모아질 수 있고,
또 그것이 일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경험했습니다.
아직 완전히 포기하지는 못하겠습니다.
시작했으니 끝을 본다는 마음보다,
시작할 때 가졌던 마음을 잘 다독이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라 생각합니다.
소솔 3.0을 시작합니다.
무게감 있는 중심이 존재하는 조직을 만들겠습니다.
상황에 매몰되지 않고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작품을 생산하겠습니다.
최대한 조직을 유지하며 지속 가능한 건축사사무소로 우리를 드러내 보겠습니다.
여느 보통과는 조금 달라도 건강한 사무실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과를 만들어내며 일상을 즐길 수 있습니다.
재원(인원, 시간)을 아끼면서도 충분히 향유할 수 있습니다.
동참해 주세요. 더 이상 소중한 청춘들에 기대어 연명하고 싶지 않습니다.
또다시 보듬지 못해 아쉬운 상황에 직면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직은 완전히 포기하지 못했습니다.
우선은 성과를 내겠습니다.
의미 있는 프로젝트에 도전하고, 눈여겨볼 만한 작업으로 이름을 알리겠습니다.
무엇보다 세상에 작업뿐 아니라 새로운 유형의 건축 집단을 알리고 싶습니다.
사냥과 낚시
집성교차목(CLT; Cross Laminated Timber)은 합판과 유사한 방식으로 목재를 직각으로 교차하며 적층 접착한 구조용 면(面)부재이다. 여느 공학목재의 안정적인 성능과 함께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구조용 면재’라는 점이다. ‘선(線)재를 활용해 얼마나 합리적으로 구축하느냐?’라는 그간의 질문을 넘어선 과제가 건축에 주어진 것이다.
나무로 된 두터운 판의 등장은 나의 상상력을 줄곧 자극해 왔다. 그 상상의 범위는 CLT 적용 분야와 관련 산업생태계를 훌쩍 건너뛰어 건축가들에게 익숙한 목구조다움의 미학에 의문을 제기하고, 우리네 일상을 담는 새로운 체계에까지 이른다. 바라건데, 이것을 우리가 지혜롭게 적용해 간다면 근대 건축을 통해 콘크리트에 부여된 보편적 재료로서의 특권적 지위가 머지않아 나무에도 주어질 것이 분명하다.
근래에 CLT를 염두해 계획한 프로젝트들이 있다. 공교롭게도 2건 모두 교회 건축인데 그리 크지 않은 예배공간을 벽식구조 나무로 마감해 정온한 분위기를 조성하기에 적합하다 판단했기 때문이다. 판은 언제든지 구부릴 수 있다.
그중 하나는 착공을 준비 중이다. 초반부터 CLT로 제안했고, 설계와 시공을 함께 진행하는 조건으로 계약했기에 시작과 동시에 전문가를 섭외해 팀을 구성했다. 자재 업체, 시공 기술자와 구조 전문가를 한자리에 모셔 서로의 노하우를 나누며, 국내 실정을 살펴 민간에서 구현할 수 있는 일관된 계획 기준을 세우는 일은 팀원 모두에게 유익했고, 예상보다 순조로웠다. 문제는 한참 후에 벌어지는데 교인 중 일부의 반발에서 시작되었다. 교인 중에는 건축 관련 일을 하시는 분들이 있기 마련인데, 그들이 실시설계 도면을 살핀 후 극렬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큰 우려에 대해 사례와 데이터를 들어가며 논리적으로 답하고 설득했으나, 나무에 대한 고착화된 인식과 생소한 자재에 대한 불안감을 넘어서긴 역부족이다. 이해한다.
이와 반대로 또 다른 프로젝트는 교회의 요청으로 진행되었다. CLT를 사용하자는 최초의 제안은 우리가 했지만, 몇 해가 지나서야 그때 그 제안대로 진행해 달라며 다시 교회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동안 다른 설계사를 통해 콘크리트로 계획을 마쳤고 시공사까지 선정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당초 우리의 계획안으로 바꾸고 싶어 했다. 단, 조건 하나가 있는데 이미 계약된 시공사와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함께 만들어갈 요량으로 흔쾌히 그 조건을 수락했으나, 시공사 대표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 후 정중히 작업을 거절해야 했다. 시공사 대표는 반평생을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분으로 그가 보유한 시공 지식은 새로움을 실험하기에 너무 완고했고, 그동안의 현장경험을 통해 축적된 자부심은 신기술 적용에 필요한 간단명료한 요청조차 다른 편법으로 대체해 불안전한 공법을 탄생시켜 냈다. 이 또한 이해한다.
이런저런 우리네 상황을 이해하고 나니, CLT의 적용은 난망하다.
“왜 장자의 축복을 스스로 져버리려 하시나이까?”
나지막이 뇌까리며 총을 내려두고 그물을 펼쳐 때를 기다린다.
소장 이영재
옛 벗에게 주는 글
어여쁜 온갖 꽃을 모두 보았고
안개 속 꽃다운 풀 두루 누볐네.
그러나 매화만은 못 만났는데
눈바람 이러하니 어쩜 좋으랴.
– 한용운 –
그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
쩡하니 울리는 얼음깨지는 소리가 겨울 저수지 바람에 실려갔다.
소솔친구들에게
오늘 우연히 건축가 서재원의 글을 살폈습니다. 제 나름의 뜻은 있으되, 미처 정리하지 못한 곳에서 앞서가는 이를 만나는 반가운 경험이었습니다. 제가 여러분과 나누어야 할 이야기를 이 글로 대신하려 합니다.
이미 성장통을 거쳐 자신만의 뚜렷한 나이테를 갖게 된 친구,
나이테는 없지만 막연히 분명한 방향을 지닌 친구,
무리 안에서 자신을 발견해 가는 친구,
무리와 반대에 서서 자신을 확인해 가는 친구……
사무실을 운영하며 다양한 친구들과 함께 일하게 됩니다.
건축에 대한 탐구와 운영에 따르는 ’결정 강요’ 사이에서 반복되는 고민이 있지만, 저는 둘 사이에서 나름의 균형 혹은 확신에 찬 시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건축가 서재원의 글을 보며 놀랐습니다. 생각과 태도는 저와 비슷하지만, 건축적 발현은 확연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건축을 대하는 기본적인 태도를 공유하고 싶습니다. 그래도 그 발현은 각자의 색으로 드러날 것이 분명합니다.
근래에 사무실 친구들에게 소솔만의 색깔, 화두, 어휘 등에 대한 질문을 자주 받게 됩니다. 간결히 정리되지 않아 두세 시간 정도를 들여야 전달할 수 있겠지만, 애써 각자의 몫으로 비워두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건축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는 건축가 서재원의 짧은 아티클로 대신 답하겠습니다.
여러분의 색이 더해지길, 그래서 더 풍부해지길 기다립니다. 빈 곳을 칠해주시고, 채워져 보이는 부분에 세심히 덧칠해 가며 각자의 색을 찾아가길 부탁합니다. 저는 제 색을 꾸준히 벼르며 이어가겠습니다.
“오늘 하루 춤출 일이 없었다면, 당신에게 오늘은 없었던 것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
폭양 속에서
마침 영주를 지나던 길에 가깝게 지내던 건축가와 시공자가 협업한 최근 준공작을 둘러보았다. 과감한 배치와 세심한 마무리 처리까지 그동안 둘이서 부대끼며 얼마나 재미있게 작업을 해왔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건물의 풍모와 내부 공간의 분위기에서 똑똑히 느껴진다.
“왕 소장도 이런 거 하나 해.”
부러운 마음에 먼 산을 바라보며 집을 나서는데, 뒤에서 다그치듯 나를 향해 외친다. 되돌아보며 씨~익 웃어 보이고 곧장 서울로 돌아오는 길은 늦여름 산천이 발그레 노을로 칠해져 생각이 많아진다.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도 있지만, 직관적으로 두어야 할 곳에 한 수 한 수를 놓으련다. 결국 그리로 가게 될 것이다. 당장은 몇 수를 잃더라고 자그마한 두 집을 꿰차고 그 일을 즐기고 있을 것이다. 여기 하는 일에 집중하자. 저기에 집착하지 말고.
좋은 소금은 폭양 속에서 고요히 온다.
우리 시대의 보편적 건축양식
도시 목구조의 복권
도시에서 건축은 하나의 문화적 현상이다. 그 때문에 가장 보편적인 땅 위에, 가장 보편적인 기능을 담고, 가장 보편적인 규모로 서 있는 수많은 ‘중간 건축’에 도시와 우리의 일상이 달려있다. 블록형 아파트를 지나 단독주택 집짓기의 광풍을 거치며 비로소 목구조는 다시금 도시 건축의 주요한 양식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여전히 일부 지역과 계층에 국한되어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고층 목조를 위한 준비의 일환으로 ‘공학목재를 활용한 몇몇 파일럿 프로젝트’들이 힘겹게 진행하고 있다.
목조건축이 다시금 우리 시대의 도시 문화로 자리잡길 기대한다. 가벼운 나무가 주변의 익숙한 재료와 만나 도시와 마을에 묵직한 존재감을 갖을 수 있을 때, 우리는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목구조 산업은 보편성과 특수성 사이의 커다란 간극을 묵인한 채 발전하고 있다. 혹은 일방적으로 특수한 것들에 매몰되어 있다는 것이 더 정확한 묘사일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중간 건축’의 영역에서 도시 목조의 복권을 애써 준비해야 한다. 목조건축의 미래는 전원에 있기보다, 도시 안에 있다.
도시 건축에서 목조의 가능성과 한계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명백한 가능성은 차치하고, 빈약한 한계에 대해 먼저 말해야겠다. 실상 한계의 대부분은 산업생태계의 부실한 준비에서 비롯된 것으로 몇 차례의 시도를 통해 쉽게 넘을 수 있는 제약에 불과하다. 반면 목구조에 대한 ‘단편적 인식’은 장벽처럼 굳건하다. 전문가와 달리 일반인은 외려 가볍고 따뜻한 내장재인 나무에 매료되어 있다. 이제는 전문가 집단이 변해야 할 차례이다. 오래돼서 진부하거나 특별해서 접목시키기 어려운 공법이 아니라, 유용한 디자인 수단으로 활용하고 ‘우리 시대의 건축양식’으로 대하고 탐구해야 한다. 우리는 도시 목조를 바탕에 두고, 다양한 요구를 수용할 고유한 해법을 고민해야 한다. 단순한 기술적 해결을 넘어 아직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일련의 과정을 묵묵히 거쳤을 때, 비로소 우리 시대만의 보편적 건축양식으로 나무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양식은 공간의 구성 원리에서부터 건축의장에 이르기까지 구축 과정 전반에 변화를 주도할 것이고 이는 우리네 삶의 방식에도 영향을 줄 것이다.
우리가 꿈꾸는 미래는 단편적 인식을 넘어 시장의 수요에 맞는 건강한 생산 기반이 조성되어야 실현된다. 도시 건축에서 ‘보편성의 확보’는 다양한 영역에서 벌이는 불완전한 실행이 지속적으로 축적되어야 가능하다. 이 지난한 과정을 해쳐 가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미약하지만 유일한 방법이고 이미 누군가는 진부한 다양함을 거부하고 구체적인 새로움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막연한 새로움에 지치고 갈급한 이들이 ‘도시 목조의 복권’에 동참하길 기다린다.

차차 나아지겠지
이맘때면 한동안 주변이 시끄럽다. 올해 젊은 건축가상을 두고, 수상자들의 면면과 이면, 심사위원의 구성과 선정 취지 등에 대해 격렬한 설왕설래가 오간다. 늘 남의 이야기로 간주해 딴청이던 내가 어째 올해는 며칠 전 공개 심사 동영상을 찾아서 정자세로 청취한다. 안 보면 그만이던 것이 막상 직접 보고 나니 머릿속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며칠이 지나도록 나를 괴롭히기에 몇 자 적어 본다.
‘척’하는 건 정말이지 방법 없다. 잠든 아이는 깨워도, 잠든 ‘척’하는 아이는 스스로 눈을 뜨기 전에는 깨울 방도가 없다. 누구는 관념적인 이론을 앞세워, 누구는 기발한 방법론을 무기로, 또 다른 이는 건물의 독특한 형태를 뽐내며 각자의 젊음을 내세운다. 이 광경을 지켜보는 이들(나를 포함해)이 바라 마지않는 젊음이란 소위 ‘치기 어린 도전과 시도’에 다름 아니다. 짧은 경력으로 혹독한 건축계에서 생존해 번듯한 건축가로 자리 잡으려 노력하는 것 그 자체가 실은 ‘위험천만한 도전’임에도 한술 더 떠 서슴없이 불구덩이를 향해 진격하는 불나방이 되려 한다. 혹은 불나방처럼 자신을 위장한다. 과연 생리학적 ‘젊음’이 건축에서도, 건축가에게도 동일한 범주의 의미로 통용되고 적용될 수 있는가? 오히려 만 45살 이하의 건축가에게 ‘젊음’을 강요하는 건 위험한 ‘덫’이지 않을까?
망망대해에서 방향을 잡고 나아가기 위해서 여러 선원이 달라붙어 ‘돛’을 올리고, 바람을 따라잡기 위해 끝없이 조종한다. 반면 항구에 정박하려는 선박은 쉽사리 ‘닻’을 내린다. 항해하는 이는 동료의 힘을 빌려 ‘돛’을 펼치지만, 정박하는 이는 ‘닻’을 내릴 항구가 필요하다. 여전히 파도에 몸을 싣고 바다를 표류하는 젊은 조직이 어딘지 모를 뭍에 당도해 항구라 여기고 닻을 내리려 애쓰는 모습이란 얼마나 우스운가! 스스로를 정립하고 정박하기 위해 선택지워진 ‘지향점’이 외려 젊은 우리에게 ‘덫’이 되지는 않을지 염려가 앞선다.
한 개인일지라도 그(그녀) 생의 역사를 균질하고 연속된 것으로 환원시키려는 모든 시도 뒤에는 사람들의 생각을 왜곡시키려는 불순한 의도를 의심받기 마련이다. 또한 한 회사의 작업이 하나의 핵심 개념으로 설명될 수 없고, 오히려 수많은 불연속적인 단층들로 구성된 복수의 주체와 상황들에 의해 결정된다면, 일관된 서술이 아니라 그것이 실천되는 과정을 구성원과 공유하고 축적하는 것이 훨씬 더 생존에 유리하다. 그런즉 축적된 작업을 통해 읽히는 서사가 ‘젊음’을 판단하는 중요한 덕목이 된다면 일관된 지향점의 엄정함과 정확성, 맹목과 집요함이 아니라 그 해석의 유연함과 유용성에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아직 미숙한 우리가 꼭 붙잡아야 할 것은 바람을 탈 수 있는 ‘돛’, 그리고 이를 함께 펼쳐줄 동료들과의 줄기찬 소통이다.
한편, 우리 세대의 ‘젊음’을 기성세대의 눈을 통해서만 평가받아야 한다는 것은 또 다른 어불성설이다. 물론, 이미 바늘구멍을 뚫고 나와 실을 꿰어낸 선배들이니 심사위원으로 나름의 당위성은 분명하나, 우리의 젊음이 획일적으로 그들에 의해 평가내려지는 모양새가 불편하기는 매한가지이다. 심지어 기성세대의 안목과 경험에 맞춰 지금 시대에 맞지 않는 모습으로 본인을 재단하려는 젊은 건축가를 우후죽순으로 양성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우리가 우리 세대에게 ‘본받을만한 젊음’을 평가할 수는 없는가? 젊은 건축가들에게 묻는다. 적어도 수상자 중 한 명은 우리들 손으로 뽑을 수 있지 않을까? 만일 ‘젊은 건축가들이 뽑은 젊은 건축가상’이 존재한다면 우리 세대는 어떤 평가 기준을 세워야 할까? 여전히 우리 세대는 한두 명의 건축가에 의해 사무소의 작업 전반이 진두지휘 되고 있는가? 그것이 디지털 시대에 현실적으로 얼마나 가능하고 유효한 작업 방식인가? 그것이 여전히 우리가 답습할 만한 건강한 모습의 설계조직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가? 당신의 사무소는 고독에 찬 건축가의 위상이 여전합니까? 등등 우리가 당면한 현상과 문제에 솔직히 답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현실에 있지도 않은 ‘젊은 건축사사무소 상’이 더 탐난다. 엄혹한 현실에서 작업의 완성도를 지켜내며 지속 가능한 조직을 만들기 위해 구성원들과 어떻게 협력해 갔는지? 그 결과 조직은 얼마나 안정된 기반을 확보했고, 또 이를 바탕으로 작업의 완성도는 어떤 식으로 높여져 왔는지? 그리고 이를 지속하기 위해 재원의 분배는 어떤 식으로 협의하며 결정됐는지? 나는 동년배 젊은 건축가들과 이런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참고할 만한 사례와 조언을 구하고 싶다.
차차 나아지겠지만,
“젊은 우린 늘 활처럼 긴장하지만, 무언가를 내내 겨눌 겨를이 아직은 없다.”
공공(空共)건축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마땅한 일이 없으니 공부한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현상설계’인데 어느덧 7개의 공공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그중 일부는 완공되었고, 또 일부는 시공 중이며, 나머지 일부는 설계를 진행 중인데 이제는 가능성을 품은 ‘현상설계’라는 단어보다 현실성이 내재된 ‘공공(公共) 건축’이라는 표현이 더 의미있게 다가온다. 공공건축의 ‘공공’이 무엇이냐? 묻고 답하는 고답적인 논의에 선뜻 감정이입이 되지 못함은 파릇파릇한 건축가로서 그간 경험한 ‘공공’은 엉뚱하게 다른 곳을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몇 번의 경험을 통해 자칫 ‘공공(公共)이 공공(空共)’이 될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을 갖게 됐다.
1. 충분한 사전 검토와 계획 없이 작성된 과업 내용은 사업의 일관성을 해친다. 심사 중에도 모호한 내용을 두고 과연 의미 있는 지침인지 난상 토론이 벌어지기 일쑤이고, 실시설계 진행 중에도 사소한 이유로 다분히 사적인 개입으로 인해 중요한 지침이 수시로 뒤바뀐다. 이는 계획안이 지키고자 한 근본적인 가치를 흔들 수 있을 정도의 변경을 수반하기도 한다.
2. 공정을 가장한 공모 심사는 무모한 요구이다. 우선 오랜 시간 고심한 참가자들의 제안은 (현행 법규를 위반하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비교적 짧은 시간 발주기관에 의해 만들어진 지침보다 우선해야 한다. 또한 제출작 모두를 살펴야 하는 심사위원들은 상대평가를 할 수밖에 없고, 이 과정에서 심사위원 개인의 건축적 성향이 영향을 주는 것은 불가피하다. 참가자는 공모를 통해 본인의 주장을 안으로 펼쳐 보일 시도를 하는 것이고, 심사위원회의 논의와 판단을 기다리면 그만이다. 기회의 공평과 과정의 공정은 결과의 형평은 엄연히 다르다.
3. 발주기관의 무소불위한 결정권은 누구에게도 이롭지 않다. 당선자는 계약을 위해 발주기관과 첫 대면하게 된다. 계약의 조건은 발주기관이 정하기 마련으로 불공정한 항목에 대한 수정은 받아들여질 수 없다. 또한 계획안의 조정 중에도 결정권이 남용된다. ‘누구의 요구입니다. 이렇게 변경해주세요.’라는 요청 중 정작 건물을 사용하게 될 수요기관의 요구는 극히 드물고, 불특정 대다수인 공공(公共)을 배려하기 위한 사려 깊은 제안일 경우는 그야말로 희박하다.
4. 턱없이 부족한 공사비 책정은 대체 누굴 위한 결단인가? 첫 미팅 자리에서 질문한다. ‘추가 공사비는 어느 정도 여유를 확보해 두셨나요?’ 책정된 공사비로는 사업 진행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발주자나 설계자 모두가 알고 시작한다. 설계자는 예정 공사비에 맞춰 내역을 줄이기에 급급하고, 다이어트 된 내역으로 공사하는 시공자는 표준 상세를 해결하기도 버거워한다. 열악한 시공 현장에 의도가 담긴 작은 포인트 디테일의 구현을 요구하는 것은 죄송스럽기도 하고, 또 스스로가 원망스럽기도 하지만 안면몰수하고 일단 외쳐는 본다. 그러나 되돌아오는 건 무기력한 메아리뿐이다.
5. 시공 현장에서 배제된 설계자의 지위는 건물에게 해롭다. 납품된 설계도서는 시공성과 유지보수의 기준을 따라 이미 상당수의 전문가로부터 몇 차례의 검토를 마친 결과물이다. 그러나 어찌 된 영문인지, 현장은 시공 편의와 유지보수를 빌미로 수차례 현장 변경을 진행한다. 요즘은 ‘설계의도구현’이라는 미명하에 설계자의 승인을 얻고 진행한다지만, 그마저도 대부분은 선시행 후보고 형식으로 앞으로 시공퀄리티를 확보하기 위한 설계자의 눈물을 머금은 타협일 경우가 많다. 그 많던 지적과 변경은 건물에 해로운 것들이었나?
6. 준공을 앞둔 시점이면 새로운 주인이 등장한다. 준공 전 숱한 협의와 조정을 거친 건물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낼 때 희미한 가능성을 담지한 설계자는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이다. 이때 수요기관 결정권자의 등장은 결정적인 카운터 펀치를 날린다. 수요자의 요구는 지극히 내밀한 개인적인 사정을 담고 있기에 대부분 타당하다. ‘아~ 진작 만나서 이야기 나눌 수 있게 해주었더라면… ‘이라는 아쉬움도 있지만, 정작 어떤 경우는 ‘엥! 지난번과 이야기가 다른데…’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동안 무수히 협의해 왔던 수요기관의 대리인은 온데간데없고, 이제 막 내정된 진짜(?) 운영자가 등장한 것이다. 이때 설계자는 무릎이 풀려 주저않지 않도록 로프에 잠시 기대어도 좋다.
7. 완공 후, 건축가의 번뇌와 노고가 묻어 있는 공공건축이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일반 시민과 공공기관이 우리의 결과물로 인해 어떻게 변해갈지? 이는 시간을 두고 시켜보자.
다만, 나는 건축가의 입장에서 지금의 공공건축을 다시금 차분히 바라보고 싶다. 공공건축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는 2013년 어느 어린이집 현상설계에서 인터커드의 당선작을 접한 후이다. 참가작 대부분이 작은 대지에서 어린이집이 요구하는 공간을 구현하려 애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당선작은 현행 법규를 타고 넘어 아주 고유한 공간과 충분히 구현할 수 있는 질서잡힌 계획안을 선보였다. ‘아~ 현실에 발을 딛고 갈고닦은 내공이 현상설계에서 유감없이 발휘되고 평가되는구나.’ 생각하며 흥미를 갖게 되었다. 몇 해 지나 인터커드는 ‘서소문 성지역사박물관’에 당선되며 널리 그 이름을 알렸다.
“이제는 공공건축이 우리 세대 한국 건축의 솔직한 성적표로 자리매김해야 해.”
사회 제도로서의 건축이 서서히 정착되기 시작한 우리는 공공건축을 통해 그 성과를 공유하고, ‘지금, 여기’ 현실과 부대끼며 성장해 온 건축가들에게 그들만의 작업을 선보이고 구현해 낼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길 기대했다. 우리 건축계는 지금부터 5년 후, 길게 잡아도 10년이 지나면 현상공모를 거친 준공작이 쌓일 것이고, 나와 유사한 과정을 거친 공공(空共)건축이 저마다의 결과물을 통해 그 성과를 평가받게 될 것이다. 감히 섣부른 예견을 하자면…….
“이대로면 공공건축제도는 적어도 건축가들에게는 낙제점을 받게 될 것이고,
이를 경험한 출중한 건축가들은 차츰 이 시장에서 자취를 감추기 시작할 것이다.”
소솔이 공공건축에 참여한 지 5년이 되어간다.
솔직담백한 집 이야기 Ⅱ
이 이야기는 오랜 기간 준비하고 실행에 옮긴 솔담 프로젝트에 관한 회고이다. 설계-시공-개발을 통합해 적정한 개발이익을 확보하고, 꽤 괜찮은 수준의 중간 건축을 제공해 건강한 도시건축의 순환이 가능한 사업모델의 출사표라 할 수 있겠다.
시작은 몇 달에 걸쳐 디벨로퍼 수업을 들은 것인데, 나름 고액의 수업비를 선뜻 지불할 수 있었던 것은 비뚤어진 다세대, 다가구 시장에 대한 불만과 도전의식에서 비롯되었다. 30여명의 수강생 중 유일한 건축사인 나는 그들 사이에서 물어볼 것 많은 조심스런 별종이었고, 서로 시원하게 터놓고 말하기 불편한 존재였을 것이다. 저명한 디벨로퍼 강사는 설계와 관련된 내용 또는 설계사를 다루는 방법에 대한 혹독한 노하우를 전달할 때면 마치 나의 동의를 사전에 구한다는 듯 늘 나와 눈을 마주친 후 열정적인 수업의 포문을 열었다. 그의 노하우를 열심히 기록한 강의노트에 따르면, 그들의 야망은 대단해 위태로웠지만 그 전략들은 충분히 치밀해 실현가능해 보였다.
한편 매주 금요일 출근길이면 동네 터줏대감인 부동산 사장님께 들러 달끈한 믹스커피를 나눠 마시며 안부 인사를 드렸다. 당연한 이치로 1순위 물건들은 여섯번째 다세대 시리즈를 준비중이라 소문난 동네를 주름잡고 있는 집장사에게 돌아갔다. 1년 정도 인사를 드리자 동네 집장사들 모두의 검토를 거쳤지만 탐탁치 않아 남게 된 이쁘장한 토지 하나를 소개받게 된다. 오랜 세월 동네 슈퍼였지만 어느새 편의점에 자리를 내어준 모퉁이 땅. 주인 어르신은 은퇴 후 상속을 준비하며 시원섭섭한 매매에 나섰다. 서둘러 검토해보니, 역시 집장사가 만족할만한 개발이익을 확보하기에는 어려운 땅이었으나, 이런저런 계획의 요령을 부려보니 사업의 연속성을 확보할 수 있는 수준의 이윤은 가능해 보였다.
계획안과 사업계획서를 작성해 평소 가까운 시공사 대표에게 달려갔다. 장황하게 사업의 취지를 설명하며 도움을 요청했다.
“대표님, 이게 제가 늘 말씀드리던 사업모델이예요. 작품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돈벌기 위한 집장사 집도 아닌, 중간 영역의 도시건축이예요.”
지금 여기서, 또 다른 보편의 실험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