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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공정의 당사자가 되고 나서

최근 심사한 설계공모에서 공정성에 대한 이의신청이 있었다.
나는 어느덧 불공정함의 당사자가 되어 있었고, 심히 당황스러웠지만 사태를 곱씹어 볼수록 나의 편협함이 도드라졌다. 공정함은 스스로의 떳떳함은 물론이고, 더하여 다양한 이해관계에 대한 배려가 동반되어야 한다. 또한 불가능에 가까운 정당한 기준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무엇보다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엄격한 잣대를 세우는 일은 지난한 과제임에 분명하다. 아래 심사위원으로 제출한 소명서를 첨부한다.

– 아래 –

◦ 심사위원 당사자 의견 :
본인은 이번 건축 설계공모와 관련하여 제기된 이의신청을 무겁게 받아들이며, 다음과 같이 소명 드립니다.

첫째, 건축 설계공모 운영지침은 심사위원 제척 사유를 구체적으로 열거된 행위에 한정하여 적용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2025년 3월 (사)새건축사협회 역시, “지침에서 명시적으로 규정하지 않은 행위까지 확장 해석하여 제척사유로 삼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취지로 유사한 이의제기에 공식적으로 의견을 회신한 바 있습니다.

둘째, 본인은 심사 과정 전반에서 공정함을 수차례 자문하며, 확신과 다짐 속에서 심사위원의 책무에 성실히 임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이번 사안에 현명하게 대응하지 못했다는 점을 깊이 반성합니다. 심사 자격의 적합성과 개인적 떳떳함에 앞서, 열정을 다해 준비하신 참가자분들의 이해관계를 보다 세심히 헤아리지 못하였고, 이로 인해 불필요한 오해가 발생했음을 통감합니다.

셋째, 특히 2차 심사과정에서 당장의 혼란을 감수하더라도 스스로 회피신청을 하는 것이 보다 현명한 처신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당선작과 입상작의 정당성, 그리고 함께 심사에 임한 위원님들의 공정성이 불필요하게 의심받는 결과를 초래하였음에 대하여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넷째, 앞으로는 심사위원으로서, 또 공모 참가자로서 보다 엄격한 잣대를 가지고 자격 여부를 신중히 검토하며, 지혜롭고 책임감 있게 처신을 하겠습니다. 다만, 신뢰가 충분히 바탕되지 않는다면 심사 자격의 기준을 어디까지 확장하여야 상호 합리적 합의에 이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숙고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저의 부족한 대응으로 불필요한 오해와 그로 인해 잠시나마 잘못된 정보에 기초한 허탈감을 드린 점 다시 한번 깊이 사과드립니다. 아울러, 본 심사의 자격과 공정성에는 문제가 없었음을 재차 강조드리며, 이번 결과로 당선작과 입상작의 성과와 위상이 훼손되지 않고, 많은 참가자분들의 노력이 올바르게 평가받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건축가 선언

또다시 선언이 나왔다. 벌써 세 번째다. 이쯤 되면 정말 선언인지도 모르겠다.

일요일 오전, 홀로 조용히 사무실 난에 물을 주고 있었다.
몇 해 만에 핀 난꽃을 조용히 즐기는데, 교회를 다녀온 둘째와 셋째가 들이닥친다.

“이건 뭐야?”
“저건 어디에 쓰는 거야?”

한동안 발길 끊겼던 사무실 구석구석을 뒤지며,
오랜만에 행차한 아이들이 내 정신까지 헤집어 놓는다.

멀찍이 떨어져 자연스레 대형 모니터 앞에 자리를 잡은 누나를 눈치 보며,
막내가 또다시 선전포고한다.

“나 이거 할래.”

“이게 뭐야?”

“이거. 건축. 나 어른 되면 이거 할래.”

사실, 아이의 이런 선언은 이미 몇 번 겪은 일이다.
대부분은 어딘가 전조 증상이 있어서, 그다지 놀랍지도 않다.
그래도 여덟 살 된 아이 입에서 수줍게 흘러나온 그 말을 들을 때면,
마음 한쪽이 스르르 내려앉는다.

‘올 것이 왔구나.’싶기도 하고,
세 번째쯤 되니, 아이도 나도 이제는 무심하게, 담담하게 주고받는다.
무릇 어른들의 대화처럼.

‘그래. 잘해봐라. 나도 이 일을 정말 좋아했었지.
지금도… 좋아는 해.’

혼잣말을 뱉고, 사부작 뒤돌아 짧은 기도를 올린다.

또 모를 일이지.
너나 나나.

문어발과 돌멩이

– 선배와의 대화 중

“정체성 말이야…”
선배는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무수한 수행 속에서 만들어지는 거고, 이리저리 포지셔닝되면서 교차성을 띠지.
그리고 결국엔, 남들이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끊임없이 바뀌더라고.”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따라 마음이 복잡했다.
여러 일들을 동시에 붙잡고 있는 내가 문어발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선배가 지긋이 웃으며 말했다.
“문어발을 억지로 자를 필요는 없어.
그 다리를 굳이 하나로 묶을 이유도 없고,
무엇보다 그런 자신을 감정적으로 타박할 필요는 없지.”

그 말이 이상하게도 마음 깊이 스며들었다.
어쩌면 나는, 나만의 세계가 없다고 단정짓는 바깥의 목소리와
흩어지고 확장되는 와중에 스스로의 부재를 견디지 못해
또다시 하나의 형틀 속에 나를 가두려 했는지도 모른다.

커피숍을 나서며 생각했다.
나는 오로지 간헐적인 순간에만 존재하고,
‘나’라고 부르는 건 사라짐을 기억하는 일일 뿐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

/

언젠가
가슴속 돌멩이 하나,
흩어진 다리들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기를.

그 돌이
집이 되고,
풍경이 되고,
누군가의 일상이 되기를.

형틀에 묶이지 않아도
스스로 서서,
익숙한 세계를 조용히 흔드는
나를 이루는 단단한 증거로 남기를.

가혹한 토양에서도
조금씩, 나로 피어오르기를.

벼리에 대하여

‘벼리’라는 말은 그물의 코를 꿰어 그물을 잡아당기거나 놓아 풀 수 있게 한 동아줄을 말한다. 예문으로는 ‘마치 투망으로 고기를 싸 놓은 꼴이 아니고 뭐냐? 이렇게 싸 놓은 고기라면 벼리 당기는 일만 남았는데……’를 들 수 있겠다. 이와 달리 일이나 글의 뼈대가 되는 줄거리를 뜻하기도 한다. 나아가 단어의 자의(字意)는 그물이 벼리를 이탈할 수 없듯이 인간이 필수적으로 지켜야 할 기본적인 도덕과 규범을 뜻하기도 한다. 망망대해에서 그물코의 성글지 못함보다, 굼실대는 물결의 일렁임보다, 내 기필코 잡아채려는 정어리보다 중한 건 ‘벼리’를 가늠하는 것이다.

한여름 무더위를 견뎌내면서도 격(格)을 지키고자 한 우리네 조상은 무척이나 지혜롭다. 늘쩍지근한 한복과 끈적끈적한 살갗에 바람길을 열어두려 등등거리를 즐겨 착용했다고 한다. 이 또한 매듭 있는 그물처럼, 그 형상과 쓰임은 단단한 테두리에 의해 결정된다. 이렇듯 막연한 무언가를 건져 올리는 일과 구체적인 형상의 정확한 간극을 비워두는 일의 근본되는 이치는 동일하다. 가늠할 수 있는 테두리를 세우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 정해진 규격의 한코 한코를 꿰어가며 테두리에 이르러 맞춰 변형시키는 것이다.

작업을 함에 있어 ‘테두리’의 막연함을 논한 안종진 소장의 발제에 화답으로 시작된 글이니, 덧붙여 약간의 오지랖을 늘어놓아야겠다. 언제 적 천사이고, 언제 적 미래와 역사이고, 언제 적 진보와 폭풍이며, 언제 적 고뇌와 우수인가? 그 시대로부터 백 년이 흘렀건만 우리는 아직도 중심의 상실에 망연자실하고 있는가? 본디 중심은 부재했다! 아니, 모든 곳이 중심이다. 함께 ‘이곳, 이 땅’의 현실에 발붙여 우리 이야기로 살아내기를 노력하세. 곁에 둔 일상을, 궤도를, 형식을, 구속을 살아내지 않고서는 그 어떤 변화와 변혁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는 알잖는가? 다시, 문제는 리얼리즘일 뿐이다. 달걀 속의 들끓는 고요가 없이 어떻게 닭이 소리쳐 신새벽을 알릴 수 있단 말인가.

말의 난장(亂場)에서

그간 작업을 핑계로 돌아보지 못했던 여러 자리에 나를 앉혀보고 있다. 물리적으로 구상하는 일에서 일정한 거리를 둔 그곳은 난무하는 ‘말’과의 다툼이고 또 화해의 장소이다.

‘그때의 말’이 ‘지금의 말’을 만나고,
‘지금의 말’이 ‘그때의 작업’을 포장하기도 하며,
‘그때의 작업’과 ‘그때의 주체’에 ‘지금의 말’이 덧붙여기도 한다.
이처럼 특정한 작업에 대한 해석은 모든 사람에게, 모든 순간 열려 있다.

1. 말과 말이 만나는 곳
그야말로 난장이고, 자리다툼이다. 담론을 선점하기 위한 전장 속에서 오롯이 ‘그때 나의 말’을 전달하기란 쉽지 않다. 펼쳐졌던 생각은 ‘각자 지금의 말’에 미끄러지고, 누군가에 의해 ‘선점된 혹은 선정된 말’에 폭력적으로 포섭되기도 한다. 의도와는 다르게, 말은 말 위에서 비껴 간다.

2. 말과 작업이 만나는 곳
누군가의 작업에 스포트라이트가 비친다. 하지만 곧 쏟아내는 말들 속에서 핀 조명의 조도는 잦아들고, 작업은 그 말들의 호명에 따라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옮겨 다닌다. 마치 본디 정해진 제 자리는 없었다는 듯, 말 속에서 작업은 유영한다.

3. 말과 작업 주체가 만나는 곳
작업과 작업 주체를 구태여 나눌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창작의 맥락과 멀찍이 떨어져 내용을 탐닉하는 이들이, 곧장 ‘상상된 imagined 작업자’를 호출한다. 그리고 말한다. “너의 자리는 여기가 아니라 저기 아니었느냐?” 그 말은 저기 눅진 곳으로 주체의 등을 떠민다.

이 세 가지 양태는 분리되어 일어나기도, 동시에 겹쳐 터지기도 한다. 나처럼 글로 생각을 정리하는데 익숙한 사람에게 이 중 가장 어렵고 난망한 건 첫 번째, ‘말’과 ‘말’로 점철된 사고(思考 또는 事故)의 전장이다.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말 앞에서 글의 리듬은 무력하고, 나는 어느새 포위되어 끌려가거나, 도망치듯 생각을 다른 세계로 숨기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의 부딪침은 지금의 나에게 꼭 필요한 과정이다. 담론을 나누고, 실천적 지혜를 발전시키기 위한 훈련. 그 말의 농도와 강도를 조절하려면 무엇보다 ‘내 생각’을 분명히 하고, 스스럼없이 꺼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글이 아닌 ‘말’로. 끝내 미끄러져 질문만이 남을지라도.

진정한 주체는, 결국 타자 속에서 발견되는 것일 테니.

누구라도 불편한 세로쓰기

___ 새 문서를 열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텍스트의 흐름을 가로가 아닌 세로로 바꿔보자 마음먹은 오늘. 그 낯선 움직임은 한 장의 글이 아닌, 건축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돌아보게 했다. ___

다시 ‘새문서 만들기’를 클릭하고 잠시 망설인다. 명조와 고딕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가끔은 아주 가끔은 재기 발랄함을 보여주려 굴림을 고르기도 하지만, 오늘은 세로쓰기 하나를 더한다.
텍스트를 상징하는 ‘T 아이콘’을 살펴보니 아래로 향하는 화살표(↓)와 나란히 쓰인 ‘T’가 보인다. 한자씩 조심히 써 내려가니 한글의 자음과 모음은 그나마 자연스럽지만 문장부호와 알파벳은 어찌할 바를 모르며 춤을 춘다. 더욱 난감한 것은 커서와 엔터, 백스페이스의 예측 불가능한 움직임. 그들을 따라야 하는 나는 마치 이집트 상형문자를 쓰고 있는 듯한 생경함에 멀미가 인다. 머리로 뜻을 읽어내지 못함은 물론이거니와 두 눈 또한 글을 가로질러 연속된 선형으로 움직이지 못한다. 그림을 보듯 부분 부분의 파편에 초점을 맞추려 하지만 글이라는 것이 대단히 분명한 시각적 의도가 있는 것도 아니니, 눈은 구석구석을 정처 없이 헤집고 돌아다닐 뿐이다. 글은 우상에서 좌하로 채워져 가는데, 내 눈은 자꾸만 비워진 좌상에서 우하로 어그적거린다.
사정이 이러하니 명조는 고사하고, 세로쓰기에는 애당초 생각이 미치지 못했구나. 더하여 한가지 깨달음에 이르니 ‘아~ 이래서 선조의 옛글은 줄을 따라 논리에 순서를 더해가며 사고를 지글지글 끌고 갔던 게로구나’.

이 불편함을 나의 ‘화두’로 삼아보자. 우선 나의 관심은 전통도 아니고, 정체성도 아니고, 독창성도 아님을 밝혀 둔다. 이는 불필요한 논쟁을 피하기 위한 선 긋기다.
탈식민지도, 동아시아 근대화도, 건축보다 대단한 영조에 관한 관심도 아니다. 콘크리트로 목구조 지붕을 흉내 내기 위함도, 고상한 정신을 담아 현대적으로 재해석을 해보고 싶음도 아니다. 비워냄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적 채움도, 적절한 크기로 나눈 것을 채와 켜로 둘러대려 함도 아니다. 풍경 좋은 곳을 향한 창에 차경과 장경을 덧씌우기 위함도 아니다. 또한 그간의 오고 간 말들로 피투성이가 된 ‘한국적임’이 어렵지만 피할 길 없으니, 길가에 난무한 지금의 여기저기를 뽑기 놀이하듯 그중에도 극히 일부가 혹은 그 한 조각이 마치 우리의 진정한 현재로 한국성의 대안임을 주장하려는 바는 더욱 아니다.
이도저도 버거운 와중인데, 바야흐로 ‘이제는 목구조의 시대가 왔다.’하여 재료와 구조의 근친성에 기대어 거리낌 없이 직설적으로 옮겨보려는 욕망은 더더욱 아니다.

그 모든 ‘아닌 것들’은 제외하고, 다시 명조로 돌아가 글을 매듭지어보자. 건축이 한 사회의 생산과 소비 활동이 추동시킨 문화적 산물이라면, 나에게 필요한 ‘한국성’은 건축산업의 여집합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것이다. 건축계가 여태껏 주장하고 논의해 온 것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둔 어딘가에 차집합으로 비어 있는 그곳. 나는 거기에 기대어본다.
나는 그저 명조를 명조답게 써 내려갈 때, 사고가 논리적으로 가능해져 이를 통해 무언가 생산적 일조를 하게 되길 바랄 뿐이다. 그 과정이 공동체에서 논의되고 결과물로도 이해되는 모종의 형식으로 자리 잡길 기대할 따름이다. 그리하여 언젠가 우리 건축이 지구 문명 안에서 분명한 교집합을 이룰 수 있다면 – 그때야 비로소 나도 이 불편한 세로쓰기를 해야만 하는 지금의 심리적 부담과 답답함을 편히 내려놓고, 다시 가로쓰기에 관심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세로쓰기는, 새로쓰기보다 어렵다. 지금은 누구라도 그럴게다.

작은 돌 하나를 기워 올리는 마음으로

__ 이화여대 강연을 준비하며

특강을 요청한 이화여대 이윤희 교수의 요청은 단순했다.
“정해진 형식은 없지만,
학생 때 이상적인 건축의 방향을 어떻게 정하고 그 길을 걸었는지,
그리고 꾸밈에 치우친 학생들에게 ‘만드는 것’에 대한 탐구를 전해주면 좋겠어요.”

막막함이 밀려왔다. 그리고 이어진 자문. ‘과연 내가 강연을 해도 되는가’. 한편으론 솔직해질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도, 가면이 곧 정체성이라 믿으며 무한한 가능성을 드러내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텍토닉’이라는 굴레,
바슐라르의 격언,
earthwork과 roofwork의 유혹,
그리고 목구조의 필연성까지 –
머릿속은 복잡했지만, 조각들을 단순히 나열하는 방식은 역시 식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수진과 이전 특강자들의 이력을 훑어보았다. 사진 하나하나엔 작지만 중요한 포커스가 있었고, 경력은 매끈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나는 이들과는 결이 다르구나.’ 그들은 분명한 궤적을 따라 걸어온 사람들이었다.

나는 어떤 길을 걸어왔던가. 왜, 어떻게 이 자리에 당도했을까. 산산조각 난 생각의 파편들이 머릿속을 맴도는 새벽 4시. 나는 사무실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있었다. 조각난 시간이 쌓여 체화된 생각이 되었고, 그 흐릿한 생각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구나. 깊숙이 나 자신에게로 담가 보면, 그건 치유될 만큼의 생채기일까. 아니면 그마저도 나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할까.

두 페이지 분량의 낙서를 채우지 못하고, 이내 다른 생각에 잠겨 뒤척이는 건, 그건 어쩌면 일종의 병인지도 모른다. ‘나’를 제쳐두고 주변과 조직을 챙기려 여기까지 왔지만, 나도, 사무실도 뜬구름 같다. 불안정한 자아는 작은 파동에도 쉽게 요동친다. 여러 일들에 퉁겨지고, 몸과 마음이 축 늘어진 상태가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지는 요즘. 마흔이 넘은 지금에도 나는 실어증을 겪고 있다. 그간 내뱉은 말과 글, 만들어낸 작업들은… 대체 무슨 의미였을까.

꽁꽁 숨어있는 저 깊은 곳, 작은 돌멩이 하나를 부여잡고 다시 우물 위로 올라와 거친 숨을 연거푸 내쉴 수 있다면… 그 돌멩이 하나를 이제라도 찾고 싶다. 기워 올리자. 분명, 작은 돌 하나는 존재한다.

‘달의 행로를 바꿀지라도.’

[이 조각난 문장들 속에서, 나는 그들에게 어떤 ‘만드는 이야기’를 전할 수 있을까.
학생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정리된 길’이 아니라 ‘조각난 신념의 고백’일지도 모르겠다.]

다른 미래

2023년 여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지금과는 확연히 다른 미래가 우리에게 오고 있음을.

완전히 새로운 시기를 맞이하려면,
그만큼 단호하고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의 실행이 필요했다.
기존과 유사한 태도로는 이미 감지되는 그 미래 속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 역시 분명해 보였으므로

그래서 우리는 ‘차별화된 새로움’을 고민했다.
미학적, 개념적, 실천적 판단의 틀 안에서
건져 올린 하나의 자구책 – 동대문

지금, 그때를 되돌아보며
동시에 내 안을 들여다보며
그 선택을 곱씹는다.

혹시, 우리의 일상 속에서
‘미래’를 더 극적이고 불안정하게 인식한다면 __
우리는 보다 급진적이고 도전적인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매일이 전혀 다른, 낯선 내일일 수 있음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더 치열하게 새로움을 준비하지 않을까?

“우리는 우환 가운데 살고, 안락 가운데 죽는다.”

소솔레터 vol.3

안녕하세요, 소솔입니다.
요즘 들어 소솔의 방향성과 작업 스타일, 조직 운영에 관한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소솔이라는 집이 걸어온 길, 그리고 앞으로의 한 걸음에 대해 소식을 나누려 합니다.

사실 ‘소솔 2.0’은 실패했습니다.
여러 HEAD가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유기적인 조직,
다양한 색이 겹쳐지는 다채로운 작업들,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건축사무소의 운영 방식들을 꿈꿨습니다.

그래서 인원을 늘리고, 일량을 키우며 여러 가능성을 실험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왜 많은 사무소들이 특정 방식으로 굳어졌는지,
왜 어떤 시도들은 오래가기 어려운지를 조금씩 배워야 했습니다.

다행히도 소중한 청춘들의 마음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고,
그 자체로 하나의 작고 단단한 영향력을 만들어 낼 수 있었습니다.
아직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시작할 때 가졌던 마음을 잘 다독이는 것’ 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소솔 3.0을 시작합니다.

우리는 이제 무게 중심이 있는 조직을 만들려 합니다.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건축을 생산하고자 합니다.
작지만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사무소를 운영하며,
성과와 일상의 균형을 함께 모색하고자 합니다.
여느 보통과는 조금 다른 건강한 사무실을 꿈꿉니다.

이제는 소중한 청춘들에 기대어 연명하지 않겠습니다.
보듬지 못해 아쉬운 이별에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습니다.

우선은 성과를 내겠습니다.
의미 있는 프로젝트에 도전하고,
눈여겨볼 만한 작업으로 이름을 알리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건축 작업만이 아니라 새로운 유형의 건축가 집단으로 알리고 싶습니다.

다시 조심스레, 색을 얹어보려 합니다.
함께 바라봐 주세요.

소솔 드림.

CLT, 아직은 낯선

기술
집성교차목(CLT: Cross Laminated Timber)은 합판과 유사한 방식으로 제재목을 직각으로 교차하며 적층·접착한 구조용 면(面)부재이다. 여느 공학목재의 안정적인 성능과 함께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구조용 면재’라는 점이다. 그간 목조건축에 주어진 과제가 ‘선(線)재를 얼마나 합리적으로 구성할 것인가’였다면, CLT의 등장은 그 질문 자체를 바꾼다. 언제든 구부릴 수 있는 판의 등장은 단순한 재료의 전환을 넘어 사고를 선도하는 재료의 개입이다.

상상
나무로 된 두터운 판의 등장은 줄곧 나의 상상력을 자극해 왔다. 그 상상의 폭은 CLT 적용 분야나 산업 생태계를 훌쩍 뛰어넘어, 목구조다움의 미학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나아가 우리 일상을 담는 건축 체계 전반에 대한 새로운 구상을 가능케 한다. 바라건대, 우리가 이 자재를 지혜롭게 받아들인다면, 근대 건축을 통해 콘크리트에 부여된 보편적 재료로서의 특권은 머지않아 나무에게도 주어질 것이다.

도전
최근에 CLT를 염두에 두고 진행한 프로젝트들이 있다. 공교롭게도 두 건 모두 교회 건축이었다. 비교적 소규모의 예배 공간을 벽식구조 나무로 마감해 정온한 분위기를 구현하고자 한 선택이었다. 두터운 목판의 존재감은 구조를 넘어 공간의 분위기를 지배하며, 그 자체로 건축적 언어가 된다.
한 프로젝트는 착공을 앞두고 있다. 초반부터 CLT 구조로 제안했고, 설계와 시공을 병행하는 조건으로 계약했기에 착수와 동시에 전문가를 섭외해 팀을 구성했다. 자재업체, 시공 기술자, 구조 전문가를 한자리에 모아 서로의 노하우를 공유하고, 국내 실정을 반영해 민간에서도 적용 가능한 일관된 계획 기준을 마련해 갔다. 이 과정은 팀원 모두에게 유익했고, 생각보다 순조로웠다.

현실
그러나 난관은 예기치 않은 시점에서 찾아왔다. 일부 교인의 반발이 시작이었다. 교회 구성원 중 건축 관련 종사자들이 있었고, 그들은 실시설계 도면을 살핀 후 CLT적용에 강한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주요 우려에 대해 사례와 데이터를 제시하며 논리적 설명했으나, 목재에 대한 고착화된 인식과 생소한 자재에 대한 불안감을 넘기엔 역부족이었다. 이해한다.

또 다른 프로젝트는 정반대의 흐름을 탔다. CLT 사용을 최초로 제안한 것은 우리였으나, 수년이 지난 뒤 교회 측으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다. 그동안 다른 설계자를 통해 콘크리트로 계획이 마무리되고, 시공사까지 선정되었지만, 초기 우리의 제안으로 방향을 되돌리고 싶다는 요청이었다. 단, 이미 계약된 시공사와 함께 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우리는 열린 자세로 그 제안을 수락했으나, 시공사 대표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눈 후, 정중히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반평생을 콘크리트 현장에서 보낸 그는 CLT라는 새로운 방식에 대해 지나치게 완고했고, 단순하고 명료한 요청조차 기존의 방식으로 대체해버렸다. 그 결과는 불완전하고 위험한 공법이었다. 이 또한 이해한다.

이해한다, 하지만
이렇듯 기술적 가능성과 사회적 수용 사이에는 아직 깊은 골이 존재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나무의 가능성, 장자의 축복 같은 기회를 왜 이토록 쉽게 외면하는가.

“장자의 축복을, 어찌 그리 쉽게 내치시나이까.”

CLT로 주문 제작한 기다란 회의 책상이 우리 사무실에 놓인 지 벌써 6년이 지났다.

감각 구조 / 구조 감각 vol.3

3부. 감응의 환류 – 서로를 짓는 관계

건축은 감각으로 시작해 구조로 나아가고,
구조는 다시 감각을 되돌려 준다.
그 사이에서 감각과 구조는 왕복 운동을 반복한다.

좋은 건축은 대체로 조용하다. 과장되게 자기 감각을 드러내지도 않고, 구조를 과시하지도 않는다. 대신, 몸과 눈, 재료와 공간, 무게와 리듬이 서로에게 조용히 반응하고 있다. 그 반응들이 축적될 때, 공간은 어느 순간 “좋다”는 감각을 준다. 그리고 그 순간은 무엇보다 먼저, 몸으로 다가온다.

이 감응은 단선적이지 않다. 건축가는 손의 감각으로 구조를 짓고, 그 구조는 다시 건축가의 감각을 길들인다. 이는 하나의 닫힌 체계가 아니라, 계속해서 정제와 배제를 거치며 조정되고 반응하는 상태에 가깝다. 재료의 응답, 공간의 리듬, 빛의 방향과 사람의 움직임 같은 수많은 미세한 변수를 마주할 때마다 우리는 다시 구조를 조율하고 감각을 조정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즉각적인 판단이 아니라, 작은 신호에 반응할 수 있는 예민한 감각이다. 그리고 이 감응은 언제나 그렇듯 작고 약한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컴퍼스의 핀 조인트, 나무의 결과 옹이, 돌의 무게와 표면, 그림자의 깊이와 방향. 이 모든 미세한 감각이 구조로 번역되고, 구조는 다시 그 감각을 증폭하거나 걸러낸다. 이 반복은 무의식적으로 이어지며, 나라는 건축가의 손길이 된다. 누군가 그것을 보고 말할 것이다.

“이건 분명 당신의 작업이네요.”

그래서 나는 감각과 구조를 따로 말할 수 없다. 그들은 언제나 서로를 짓고, 서로에 의해 드러나며, 다시금 서로를 반응시키는 환류의 관계에 있다.

이 되먹임은 하나의 작업 안에서도 반복된다. 도면을 그리며 상상하고, 모델을 만들며 확신하고, 시공 중에도 수정을 한다. 그 모든 피드백이 ‘감각과 구조’ 사이를 오가며, 종국에 이르러 하나의 고유한 공간, 즉 하나의 세계를 만든다. 이는 건축가의 내면화된 태도에서 기인한다. 감각과 구조를 오가며 서서히 자리잡게 된 태도. 그래서 나는 이 끝없는 순환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 ‘환류’야말로, 건축이 태어나는 가장 근원적인 방식이라 믿는다.

감각과 구조는 서로를 짓고 길들인다.

감각 구조 / 구조 감각 vol.2

2부. 구조 감각 – 질서의 촉감

건축의 구조는 단순한 뼈대가 아니다.
무게를 다루는 동시에 분위기를 지배하며,
감각이 머무를 수 있는 질서를 부여한다.

경험이 쌓이면서, 나는 어떤 구조가 좋은지에 대한 판단 기준이 점점 몸 안쪽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수치로 계산하지 않아도 “이건 맞고, 저건 아니다”라는 감각이 먼저 온다. 순수한 물성으로 이해되던 물질을 형식이 부여된 사물로 전환시키도록 이끄는 구조 감각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축과 좌표, 모듈을 통해 이해하려 했다. 하지만 점차 알아가게 되었다. 좋은 구조는 그 자체로 리듬을 지니며, 마치 호흡하듯 공간에 생기를 불어넣고, 손끝의 촉각을 일으킨다. 보이지 않는 균형과 접합부의 맥락, 공간의 단위들이 빗어내는 응축된 밀도. 그것은 숫자로만 환원될 수 없는 촉감의 질서다.

구조 감각은 언제나 사물과 연결되어 있다. 나사 하나, 경첩 하나, 철물의 조인트. 그것이 어떻게 결합되는지, 어느 정도의 유격을 허용하는지, 한 손으로 조일 수 있는가, 두 손을 써야 하는가. 이 모든 것은 공간의 구성에 앞서 구성의 형식을 가다듬는 방향을 지시한다. 표면적으로는 동일한 분절로 보일지라도, 면을 분할해간 것과 선을 모아 집적시킨 것은 엄연히 다른 감각에서 출발해 예기치 못한 결과적인 차이를 이끌어낸다.

현장을 경험하며 우리는 작동하는 디테일을 배운다. 그러나 결국 중요한 것은 그 디테일이 말하려는 구조의 결이다. 어떤 구조는 숨고, 어떤 구조는 드러난다. 어떤 구조는 버티고, 어떤 구조는 안긴다. 이 차이를 구분하고 감지할 수 있는 능력, 즉 감각을 매개로 구조의 기질을 가늠하고 읽어내어 선별하는 능력이 바로 구조 감각이다.

나는 구조가 만드는 긴장과 응축, 그 리듬을 상상하며 설계한다. 특히 목구조 작업에서는 그 감각이 한층 민감해진다. 나무는 유연하고, 살아 있고, 부재와 부재가 만나는 방식은 수치보다 결의 논리로 움직인다. 그렇게 구조는 더 이상 숨겨지지 않는 존재가 되고, 감각으로 그 질서를 길들이기 시작한다. 감각이 구조보다 앞서면 깨지고, 구조가 감각을 놓치면 느슨해진다. 바람직한 구조를 기다리며 언제나 감각과 밀당한다.

그런 의미에서 구조 감각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태도이자 세계를 대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오랜 시간 손으로 짓고, 눈으로 읽고, 몸으로 반응하며 형성된 ‘내면의 기하학’ 같은 것이다. 그 감각은 어느새 손의 궤적, 머리 속 시선, 마음의 균형까지 스며든다. 나는 그것을 질서의 촉감이라 부르고 싶다. 아직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만져지는 질서. 그래서 그것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 건축가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자산이라 믿는다.

구조 감각은 공간을 매개로 다시 감각을 길들인다. 사람이 공간을 걸을 때, 그 무게와 속도, 멈춤과 머뭇거림, 시선의 방향까지 모두가 구조를 통해 촉발된다. 그때 감각은 구조 속에서 다시 진동하기 시작하고, 감지된 감각에 기대어 우린 또다시 구조를 지각한다. 그 되먹임이 반복되며 공간은 살아 있는 하나의 질서가 되고, 어느덧 자기만의 존재 방식을 지닌 태도로 자리잡는다.

1부가 “손으로 짓는 감각”을 이야기했다면, 2부는 “몸으로 읽는 구조”를 이야기했다. 감각이 구조로 이끌고, 구조는 감각을 일깨운다. 그 호혜의 관계 안에서 건축은 더 이상 기능의 조합도, 조형의 산물도 아니다.

건축은 감응된 질서이자, 조직된 감각 그 자체다.

감각 구조 / 구조 감각 vol.1

1부. 감각 구조 – 손으로 짓는 질서

사물은 결국 손에 닿는다.
눈보다 밀착해서, 논리보다 선명하게.

어린 시절 아버지의 컴퍼스를 만났을 때, 그것은 단순히 도형을 그리는 도구가 아니었다. 조심스럽게 핀을 맞추고, 미세하게 축을 돌리며, 적당한 힘으로 종이를 누를 때, 나는 하나의 구조를 만지고 있었다. 그것은 손끝에 전해지는 감각을 통해 나를 이해시키는 구조였다.

이 감각은 설계도면 위의 구조적 해석이나 수치와는 다르다. 그것은 ‘촉각적 구조 감각’, 또는 ‘손끝으로 감지된 질서’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건축가가 종이에 선을 긋기 전에, 이미 마음속에서 무게와 저항, 장력과 탄성의 리듬이 구상되어 있는 그런 상태. 생각의 명료함보다는 감각의 정교함을 통해 긴 여정의 보따리를 꾸리게 된다.

건축을 하며 처음 나무를 만졌을 때, 그 결을 따라 가공하고 결구하는 감각은 마치 구조를 손으로 ‘읽는’ 일이었다. 단단함과 부드러움, 반발력과 유연함, 이 모든 감각들이 구조를 구성하는 부재들의 언어가 된다. 설계는 그 언어를 번역하고 조직하는 일이다. 그래서 감각은 구조의 근원이자, 해석하는 언어이며, 때로는 교란자이기도 하다.

감각 구조는 이처럼 수치로 환원되지 않는 질서다. 눈에 보이기 전, 설계로 도식화되기 전, 어떤 사물이 놓이는 ‘방식’ 자체에 감각이 개입된다. 예를 들어 나무 루버 하나를 놓을 때, 그 간격은 단순히 빛의 투과율로 계산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의 걸음 속도, 햇살의 투사 각도, 재료의 질감, 손으로 느낄 여백까지 감안한 결정이다. 그리고 그 전체가, 하나의 ‘구조’를 형성한다.

이런 감각은 오히려 만드는 과정에서 더 선명해진다. 도면을 그릴 땐 보이지 않던 질서가, 제재소에서 손에 쥐었을 때, 나무 기둥을 세울 때, 마감을 서서히 붙이는 과정에서 문득 느껴진다. 때로는 그 감각이 기존의 설계를 다시 고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럴 때 건축은 더 이상 관념적이지 않다. 건축은 말 그대로 감각으로 ‘지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감각이 정확할수록 구조는 명료해지고, 그 구조가 섬세할수록 감각은 더욱 살아난다. 그 둘은 서로를 밀어 올리며, 한 작업을 완성으로 이끈다.

나는 구조를 계산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손으로 짓는 사람이고 싶다. 감각은 나에게 항상 구조보다 먼저 다가왔고, 구조는 그 감각을 증명해 주는 언어였다. 감각은 설계를 이끌고, 구조는 그 감각을 따라 구성된다. 그러므로 짓는 방식은 감각에 구체성을 부여하는 강도와 관계된다.

감각 구조는 그렇게 태어난다. 그것은 본능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훈련의 산물이다. 우연처럼 다가오지만, 사실은 반복된 만짐의 기억이다. 그리고 언젠가 그 감각은 하나의 구조로 구체화된다. 사물의 몸을 지탱하고, 공간의 분위기를 만들고, 보이지 않는 규칙을 세운다.

손끝에서 시작된 감각이 세계의 질서를 구성하는 구조로 응축되는 것.
그것이 내가 믿는 건축의 시작이다.

소장 이영재

소중한 이의 죽음 앞에서
적절하다고 책정된 물리적 시간은 3일.

옛 벗에게 주는 글 _ 한용운

어여쁜 온갖 꽃을 모두 보았고
안개 속 꽃다운 풀 두루 누볐네.
그러나 매화만은 못 만났는데
눈바람 이러하니 어쩜 좋으랴.

/

그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
쩡 — 울리는 얼음 깨지는 소리가
겨울 저수지 바람에 실려 멀리까지 갔다.

색을 얹으며

오늘 우연히 건축가 서재원의 글을 살폈습니다.
제 나름의 뜻은 있지만 아직 정리되지 못한 생각들,
그 너머에서 앞서가는 이의 시선을 만나는 듯해 반가웠습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를 이 글로 대신 전하고자 합니다.

이미 자신만의 뚜렷한 길을 걷는 이들,
아직 나이테는 없지만 방향을 품은 이들,
무리 속에서 자신을 찾아가는 이들,
무리와 반대에 서서 자신을 확인해 가는 이들…

저는 사무실을 운영하며 다양한 동료들과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건축에 대한 탐구와 조직 운영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일은 쉽지 않지만,
그 둘 사이에서 나름의 확신을 가지고 조심스레 시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서재원의 글을 통해 느낀 건 분명했습니다.
건축가로서의 태도와 생각은 닮아 있지만,
작업의 방식과 발현은 전혀 다른 색으로 드러난다는 것.
그래서 더욱 일독을 권합니다.

요즘 들어 소솔의 색깔이나 화두, 어휘에 대해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들을 단번에 설명하기보다,
각자가 채워야 할 몫으로 차분히 비워두고자 합니다.
그 빈자리를 서재원의 짧은 글이 가볍게나마 대신해주길 바랍니다.

소솔에 여러분의 색이 더해져 더욱 풍성해지기를 기대합니다.
비어 있는 공간에 색을 얹고, 채워진 듯한 자리에도 다시 결을 더하며,
자신만의 색을 찾아가시길 바랍니다.
저도 저만의 색을 벼르며 조용히 나아가겠습니다.

그렇게 매일의 사소한 질문과 탐색이 쌓여
언젠가 우리만의 춤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 하루, 그 춤에 한 걸음 내딛는 일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오늘을 살아낸 것입니다.

“오늘 하루 춤출 일이 없었다면, 당신에게 오늘은 없었던 것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