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모를 일

건축가 선언

벌써 세 번째. 이쯤 되면 선언에 가깝다.
일요일 오전, 홀로 조용히 사무실 난에 물을 주며 몇 년 만에 핀 난꽃을 즐기는데, 교회를 다녀온 둘째와 셋째가 들이닥친다. 이건 뭐고, 저건 어디에 쓰는 물건이냐며 오랜만에 행차하신 사무실 구석구석을 뒤지며 내 정신을 헤집어 놓는다. 멀찍이 떨어져 자연스럽게 대형 모니터 앞에 자리를 차지한 누나 몰래 막내가 또다시 선전포고한다.

“나 이거 할래.”

“이게 뭐야?”

“이거, 건축. 나 어른 되면 이거 할래.”

실은 대부분의 선전포고는 전조증상으로 인해 그닥 충격적이지 않다. 5살 된 아이 입에서 본인의 꿈이 수줍게 새어 나올 때, ‘올 것이 왔구나.’라며 덜컥 마음이 내려앉더니 세 번째쯤 되니 이제는 아이도 나도 서로 무심하고 담담한 것이 무릇 성인들의 대화에 가깝다.
‘그래. 잘해봐라. 나도 이 일을 정말 좋아했었다. 지금도 좋아는 한다.’ 혼잣말을 뱉어내고 뒤돌아 서 짧은 기도문을 외운다.

‘또 모를 일이다. 너나 나나.’

벼리에 대하여

‘벼리’라는 말은 그물의 코를 꿰어 그물을 잡아당기거나 놓아 풀 수 있게 한 동아줄을 말한다. 예문으로는 ‘마치 투망으로 고기를 싸 놓은 꼴이 아니고 뭐냐? 이렇게 싸 놓은 고기라면 벼리 당기는 일만 남았는데……’를 들 수 있겠다. 이와 달리 일이나 글의 뼈대가 되는 줄거리를 뜻하기도 한다. 나아가 단어의 자의(字意)는 그물이 벼리를 이탈할 수 없듯이 인간이 필수적으로 지켜야 할 기본적인 도덕과 규범을 뜻하기도 한다. 망망대해에서 그물코의 성글지 못함보다, 굼실대는 물결의 일렁임보다, 내 기필코 잡아채려는 정어리보다 중한 건 ‘벼리’를 가늠하는 것이다.

한여름 무더위를 견뎌내면서도 격(格)을 지키고자 한 우리네 조상은 무척이나 지혜롭다. 늘쩍지근한 한복과 끈적끈적한 살갗에 바람길을 열어두려 등등거리를 즐겨 착용했다고 한다. 이 또한 매듭 있는 그물과 유사하여 엉켜있는 그물보다 단단한 테두리에 의해 그 형상과 쓰임이 결정된다. 이렇듯 막연한 무언가를 건져 올리는 일과 구체적인 형상의 정확한 간극을 비워두는 일의 근본되는 이치는 동일하다. 가늠할 수 있는 테두리를 세우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 정해진 규격의 한코 한코를 꿰어가며 테두리에 이르러 맞춰 변형시키는 것이다.

작업을 함에 있어 ‘테두리’의 막연함을 논한 안종진 소장의 발제에 화답으로 시작된 글이니, 덧붙여 약간의 오지랖을 늘어놓아야겠다. 언제 적 천사이고, 언제 적 미래와 역사이고, 언제 적 진보와 폭풍이며, 언제 적 고뇌와 우수인가? 그때로부터 100년이 지났건만 우리는 아직도 중심의 상실에 망연자실하고 있는가? 본디 중심은 부재했다! 아니, 모든 곳이 중심이다. 함께 ‘이곳, 이 땅’의 현실에 발붙여 우리 이야기로 살아내기를 노력하세. 곁에 둔 일상을, 궤도를, 형식을, 구속을 살아내지 않고서는 그 어떤 변화와 변혁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는 알잖는가? 다시, 문제는 리얼리즘일 뿐이다. 달걀 속의 들끓는 고요가 없이 어떻게 닭이 소리쳐 신새벽을 알릴 수 있단 말인가.

말의 난장(亂場)에서

그간 작업을 핑계로 돌아보지 못한 다양한 자리에 나를 앉혀보고 있다. 무엇의 구상과는 일정한 거리를 둔 그곳은 난무하는 ‘말’과의 다툼이고 또 화해의 장소이다. ‘그때의 말’이 ‘지금의 말’을 만나기도 하고, ‘지금의 말’이 ‘그때의 작업’을 포장하기도 하고, ‘그때의 작업과 주체’에 ‘지금의 말’을 붙이기도 한다. 특정 주제와 작업에 대한 해석은 모두에게 모든 순간 열려 있다.

1. ‘말’과 ‘말’이 만나는 곳
그야말로 난장이고, 자리다툼이다. 담론을 선점하기 위한 전장으로 오롯이 ‘그때 나의 말’을 전달하기에는 버겁다. 펼쳐져 있던 생각이 ‘각자의 지금 말’에 미끄러지기도 하고, 누군가에 의해 ‘선점된 혹은 선정된 ‘말’에 폭력적으로 포섭되기도 한다.

2. ‘말’과 ‘작업’이 만나는 곳
누군가의 작업에 스포트라이트가 비친다. 그러나 쏟아내는 ‘말’들 덕분에 핀 조명의 조도는 충분히 잦아들고, ‘작업’은 ‘말’의 호명에 따라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옮겨가며 본디 정해진 제 자리는 없음을 굳이 증명해 낸다.

3. ‘말’과 ‘작업 주체’가 만나는 곳
작업과 작업 주체를 구태여 분리할 필요가 있을까마는 창작의 과정과 내용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나온 사람들이 그 ‘작업’을 탐닉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상상된 imagined 작업자’를 불러내 ‘너의 자리는 거기가 아니라 여기가 아니냐?’라며 저기 눅진 곳으로 주체의 등을 떠민다.

이렇듯 ‘말의 난장’에서 벌어지는 세 가지 양태는 분리되기도 하고, 한자리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기도 한다. 글로 생각을 정리해 가는데 익숙한 나에게 이 중 가장 어렵고 난망한 것은 첫 번째 경우이다. ‘말’과 ‘말’로 점철된 사고(思考 또는 事故)의 전장에서 ‘글’의 리듬으로 대적함은 무기력하여 속사포 ‘말’들에 포위당해 끌려가든, 도망치듯 딴청 부려 잠시 다른 세계로 나를 피신시키기 십상이다.

‘말’의 부딪침은 모두가 이야기 나누며 담론을 형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지금 나에게 꼭 필요한 과정으로 보인다. 말의 농도와 강도를 조절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우선 ‘내 생각’을 분명히 하고 스스름없이 드러내는 것부터 시작이다. 글이 아닌 말로 대신하는 요령을 배워야겠다. 끝내 미끄러져 질문을 낳겠지만, 진정한 주체는 타자 속에 있다.

누구라도 불편한 세로쓰기

또 ‘새문서 만들기’를 클릭하고 잠시 망설인다. 명조와 고딕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가끔은 아주 가끔은 재기 발랄함을 보여주려 굴림을 고르는데 오늘은 세로쓰기 하나를 더한다. 텍스트를 상징하는 ‘T 아이콘’을 살펴보니 아래로 향하는 화살표(↓)와 나란히 쓰인 ‘T’를 발견할 수 있다. 한자씩 조심히 써 내려가니 한글의 자음과 모음은 그나마 자연스러운데 문장부호와 알파벳은 어찌할 바를 모르며 춤을 춘다. 더욱 난감한 것은 커서와 엔터, 백스페이스의 예상치 못한 움직임인데 이를 따라야 하는 나는 마치 이집트 상형문자를 쓰고 있는 듯한 생경함에 멀미가 인다. 머리로 뜻을 읽어내지 못함은 물론이거니와 두 눈 또한 글을 가로질러 연속된 선형으로 움직이지 못하고 그림을 보듯 부분 부분의 파편에 초점을 맞추려 하지만 글이라는 것이 대단히 분명한 시각적 의도가 있는 것도 아니기에 구석구석을 정처 없이 헤집고 돌아다닐 뿐이다. 글은 우상에서 좌하로 채워져 가는데, 나의 눈은 자꾸만 비워진 좌상에서 시작해 어그적 어그적 우하로 움직인다. 사정이 이러하니 명조는 고사하고 세로쓰기에는 애당초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것이구나. 더하여 한가지 깨달음에 이르니 ‘아~ 이래서 선조의 옛글은 줄을 따라 논리에 순서를 더해가며 사고를 지글지글 끌고 갔던 게로구나’.

이와 같은 불편함이 나의 ‘화두’가 되어야겠다. 우선 나의 관심은 전통도 아니고, 정체성도 아니고, 독창성도 아님을 밝히려 한다. 이는 불필요한 논쟁을 줄이기 위함으로 탈식민지도 아니고, 동아시아 근대화도 아니고, 건축보다 대단한 영조에 관한 관심도 아니다. 콘크리트로 목구조 지붕과 결구를 흉내 내기 위함도 아니고, 고상한 정신을 담아 현대적 재해석을 해보고 싶음도 아니고, 비워냄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적 채움도 아니고, 적절한 크기로 나눈 것을 채와 켜로 둘러대려 함도 아니고, 풍경 좋은 곳을 향한 창에 차경과 장경을 덧씌우기 위함도 아니다. 또한 그간의 오고 간 말들로 피투성이가 된 ‘한국적임’이 어렵지만 피할 길 없으니, 길가에 난무한 지금의 여기저기를 뽑기 놀이하듯 그중에도 극히 일부가 혹은 그 한 조각이 마치 우리의 진정한 현재로 한국성의 대안임을 주장하려는 바는 더더욱 아니고, 이도저도 버거운 와중인데 바야흐로 이제는 목구조의 시대가 왔다 하여 재료와 구조의 근친성에 기대어 거리낌 없이 직설적으로 옮겨보려는 욕망은 더더욱 아니다.

아닌 것은 제외하고, 원래 쓰려했던 명조로 글을 매듭지어보자. 건축이 한 사회의 생산과 소비 활동이 추동시킨 문화적 산물이라면, 나에게 필요한 ‘한국성’은 건축산업에서 여집합으로 남겨져 있을 것이고, 건축계가 여태껏 주장하고 논의해 온 것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둔 어딘가에 차집합으로 비어 있을 것이라 믿는다. 다만 나는 명조를 명조답게 써 내려갈 때 논리적인 사고가 가능해져 이를 통해 생산적 일조를 하게 되길 바랄 뿐이다. 그리고 그 과정이 공동체에서 논의되고 결과물로도 이해되는 모종의 형식으로 자리 잡길 기대할 따름이다. 그리하여 우리 건축이 지구 문명 안에서 분명한 교집합을 이룰 수 있다면 나조차도 불편한 세로쓰기를 해야만 하는 지금의 심리적 부담과 답답함을 편히 내려놓고 다시 가로쓰기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겠다. 세로쓰기가 새로 쓰기보다 어려울게다. 누구라도 그럴게다.

자기의 게임

특강을 요청한 이화여대 이윤희 교수의 요청은 단순했다.
‘정해진 형식은 없지만, 추구하는 이상적인 건축 방향을 학생 때 어떻게 정해서 navigate를 했는지, 꾸밈에 편중된 학생들에게 만들어지는 것에 대한 탐구에 관해서도 이야기해 주길.’

막막함과 함께 강연 자격에 대한 자문.
솔직해지려는 안이함과 정돈된 나를 찾아볼 기회라는 욕심.
‘텍토닉’이라는 굴레.
바슐라르의 격언.
earthwork과 roofwork의 유혹
목구조의 필연성.
상황을 헤쳐간 과정과 나열식 구성의 식상함.

학교의 홈페이지를 뒤지며 교수진의 구성과 이전 특강자의 면면을 살펴본다. ‘나와는 결이 다르구나.’ 작지만 중요한 무엇에 포커싱된 사진과 매력적인 경력으로 채워져 있구나. 삶의 궤적이 다르다. 대체 나는 어떤 길을 걸어온 것인가? 왜, 어찌하여 여기에 당도했는가! 산산조각 난 생각의 파편들에 잠 못 이루며 새벽 4시 사무실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있는가?

조각난 시간은 체화된 생각으로 이어져 흐리멍덩해진 지금의 나를 만들었구나. 깊숙이 나에게로 담가지고 나면 치유될 만큼의 생채기인가? 아니면 그 자체로 ‘나’라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두 페이지 낙서를 못 채우고 이내 다른 생각에 뒤척이는 건 일종의 병이다. ‘나’를 제쳐두고 주변과 조직을 걱정하는 오지랖으로 여기에 당도했으나, 나도 사무실도 뜬구름. 불안정한 자아는 아주 작은 파동에도 크게 요동친다. 어느덧 이 일 저 일 퉁겨지다 축 늘어진 몸과 마음이 더 편하게 느껴진다.

마흔이 넘은 지금에야 실어증을 겪게 된다. 그간 뱉어 온 말과 글은 무엇이며, 만들어낸 작업은 무슨 소용인가? 꽁꽁 숨어있는 저 깊숙한 곳 작은 돌멩이를 부여잡고 다시 우물 위로 올라와 거친 숨을 연거푸 뱉어 낼 수 있다면……. 그 작은 돌멩이 하나를 이제라도 찾고 싶다. 기워 올리자. 분명 작은 돌멩이 하나는 존재한다.

‘달의 행로를 바꿀지라도.’

사춘기를 준비하며

소솔 친구들께.

오랜만에 월간회의를 합니다. 올 상반기는 작년 에 시작된 서울(동대문)도서관의 안착과 협업을 통한 경쟁 공모 참가로 인해 예상하지 못했던 뜻밖의 부산한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정리된 글로 인사를 나누어야 하는데, 조각난 과정과 미처 마무리되지 않은 일들로 아직은 두서없는 상태이지만 생각과 소식을 전하려 합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고 또 예상과 계획보다는 과감한 실행과 공유가 중요한 시점이라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내년이면 소솔건축이 열 살이 됩니다. 지금 우리가 여타 사무실에 비해 재정적인 여유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지극히 한시적일 것입니다. 과연 ‘소솔이 지속 가능한 성장동력을 확보했는가?’라는 질문에는 외려 여느 사무실에 비해 빈약한 체질이라고 스스로 답하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한동안 이 문제에 집중하고 준비하는 시간을 보내려 합니다.

1. ㈜소솔건축사사무소, 법인으로 전환하겠습니다.

그동안 개인사업자로 운영하며, 여러 파트너와 함께 사무실의 재정을 유연하게 운영하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높은 세금부과율과 운영 기준의 불투명성 등 체질적인 한계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올 8월 안에 법인으로 전환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법인으로의 전환은 세금 문제로 인해 급하게 진행되겠지만, 여러분과 상의하고 요청하게 될 몇 가지 사안들(지출 및 업무 기준, 퇴직금의 정산 등)은 시간을 두고 논의하며 진행할 계획입니다. 건강한 운영체계를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2. 그동안의 작업을 정리하고, 마케팅 기반을 마련하겠습니다.

오랜 시간 다양한 작업을 진행해 왔지만, 극히 일부만을 정리하며 외부에 알려왔습니다. 그때문에 저희의 성과에 비해 인지도가 낮고 편중된 것이 사실입니다. 홈페이지를 재단장 하며 그동안의 작업을 정리하고, 퍼블리싱과 출품을 준비하겠습니다. 그리고 ‘2025년 젊은 건축가상’에 도전하겠습니다.
‘소솔의 색깔은 무엇이냐?’라는 물음에 즉답하는 걸 피해 왔습니다. 우선은 생존을 위해 어느 영역이든 뿌리내리는 것이 급선무였고, 여러 파트너와 스텝의 다양한 성향과 성장 방향을 열어 두려는 의도였습니다. 이제는 그동안의 작업을 정리하며, 우리가 함께 견지해야 할 몇 가지를 추려볼 생각입니다. ‘소솔의 색’을 선언하는 일은 더 늦추면 뚜렷한 우리 색을 추출하기에 점점 어려워질 것이라는 개인적인 판단입니다. 다소 무리하고 막연하지만, 사전에 공유하자면, ‘지금 여기 한국’과 ‘보편의 실험’(아직 적합한 단어를 찾지 못했습니다.)은 우리가 함께 성장하는 데 중요한 가치가 될 것 같습니다.

“우리가 건축적으로 뿌리내릴 토양은 어디이고, 나아가야 할 시장은 어디인가?”

두 가지 문제는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는 여전히 설계사무소로써 먹고 사는 일과 밀접하고, 앞으로의 시장을 내다보며 결정해야 하며, 스스로 또 다 같이 탐험하며 즐길 수 있을 만한 건축적 주제여야 하기에 조심스럽지만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일입니다. 시장과 호흡하며 소솔의 건축을 견지할 수 있는 마켓을 고민하고 작업을 통해 지속적으로 우리를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이는 마치 구석진 자리에 거미줄을 쳐 놓고, 먹이를 기다리는 거미의 생존 방식과 유사합니다. 자신을 어느 지점에 정박시켜 터를 닦는 것은 지난한 기다림의 연속으로 불확실함에서 오는 외로움과 때를 참고 기다려야 하는 배고픈 현실을 한동안 마주할 것이라 예상합니다. 다양한 색의 조합으로 덧칠되어, 예상을 넘어선 우리가 드러날 것이라는 믿음은 여전합니다. 정리되는 대로, 여러분과 이야기를 나누며 또 수정해 가겠습니다.

3. 진행 중인 프로젝트에 더 집중하겠습니다.

다수의 프로젝트가 현장에서 공사 중이고, 몇몇 프로젝트가 설계 납품을 앞두고 있습니다. 지난 1년 동안 저는 소장급 파트너가 PM으로 진행했던 프로젝트를 감리하며 현장에서 불거진 문제들을 파악하고 해결해 왔습니다. 반면 최근에는 여러분이 직접 PM이 되어 공들여 작업한 도서를 함께 검토합니다. 또 합사의 일원으로 묵묵히 우리 몫을 해내고 있는 친구들의 등을 다독이고 있습니다. 덕분에 아직은 부족하지만, 더 긍정적인 소솔의 미래를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요즘은 2020년에 시작해 이제서야 준공된 프로젝트들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아쉬움과 한계가 여실하지만, 그 과정에서 얻게 된 경험과 노하우가 축적됐고, 지금은 여러분의 작업이 빛날 수 있는 토대가 준비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마무리까지 집중해 주시길 부탁드리고, 앞으로도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마련하는 데 노력하겠습니다.

새벽에 뒤척이며 일어나 ‘오늘은 어설퍼도 생각을 나누어야지.’라고 결심하며 침대를 박차고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정신없이 써 내려간 긴 글 덕분에 깜박이는 커서의 압박에서 비교적 자유로워졌고, 이제야 여러분 각자의 고민을 거칠게 헤아려 봅니다. ^^
결혼을 앞둔 청년, 나는 누구 또 여긴 어디인지 살필 겨를도 없이 숨 가쁘게 달리는 청춘들, 긴 호흡을 마치고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는 이, 묵묵히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는 조력자, 막연한 즐거움에 몸을 맡긴 인턴……

그동안 잘해 오셨고, 또 아직은 불완전한 생(未生) 입니다.

다음 주에 있을 워크숍은 오롯이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편안한 시간을 보내시길, 덕분에 여유롭게 기다리며 서로를 지켜봐 줄 수 있는 계기가 되길, 그래서 함께 즐겁기를 기대합니다. 차분히 여행 준비하시고 과정 과정마다 웃으며 만납시다.

2024년 8월 12일
왕성한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