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 선언
또다시 선언이 나왔다. 벌써 세 번째다. 이쯤 되면 정말 선언인지도 모르겠다.
일요일 오전, 홀로 조용히 사무실 난에 물을 주고 있었다.
몇 해 만에 핀 난꽃을 조용히 즐기는데, 교회를 다녀온 둘째와 셋째가 들이닥친다.
“이건 뭐야?”
“저건 어디에 쓰는 거야?”
한동안 발길 끊겼던 사무실 구석구석을 뒤지며,
오랜만에 행차한 아이들이 내 정신까지 헤집어 놓는다.
멀찍이 떨어져 자연스레 대형 모니터 앞에 자리를 잡은 누나를 눈치 보며,
막내가 또다시 선전포고한다.
“나 이거 할래.”
“이게 뭐야?”
“이거. 건축. 나 어른 되면 이거 할래.”
사실, 아이의 이런 선언은 이미 몇 번 겪은 일이다.
대부분은 어딘가 전조 증상이 있어서, 그다지 놀랍지도 않다.
그래도 여덟 살 된 아이 입에서 수줍게 흘러나온 그 말을 들을 때면,
마음 한쪽이 스르르 내려앉는다.
‘올 것이 왔구나.’싶기도 하고,
세 번째쯤 되니, 아이도 나도 이제는 무심하게, 담담하게 주고받는다.
무릇 어른들의 대화처럼.
‘그래. 잘해봐라. 나도 이 일을 정말 좋아했었지.
지금도… 좋아는 해.’
혼잣말을 뱉고, 사부작 뒤돌아 짧은 기도를 올린다.
또 모를 일지.
너나 나나.
문어발과 돌멩이
– 선배와의 대화 중
“정체성 말이야…”
선배는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무수한 수행 속에서 만들어지는 거고, 이리저리 포지셔닝되면서 교차성을 띠지.
그리고 결국엔 남들이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끊임없이 바뀌더라고.”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따라 마음이 복잡했다.
여러 일들을 동시에 붙잡고 있는 내가 문어발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선배가 지긋이 웃으며 말했다.
“문어발을 억지로 자를 필요는 없어.
그 다리를 굳이 하나로 묶을 이유도 없고,
무엇보다 그런 자신을 감정적으로 타박할 필요는 없지.”
그 말이 이상하게도 마음 깊이 스며들었다.
어쩌면, 나만의 세계가 없다고 단정짓는 바깥의 목소리와
흩어지고 확장되는 스스로를 견디지 못해
나는 또다시 하나의 형틀 속에 나를 가두려 했는지도 모른다.
커피숍을 나서며 생각했다.
/
언젠가,
가슴속에 돌멩이 하나쯤은
거센 강물에 휩쓸리지 않고
묵직한 무게로 제자리를 찾기를.
언젠가는,
그 돌이 집이 되고, 풍경이 되고,
누군가의 일상이 되기를.
그리하여,
익숙한 세계를 조용히 흔드는
나를 이루는 단단한 증거로 남기를.
가혹한 토양에서도
조금씩, 나로 피어오르기를.
벼리에 대하여
‘벼리’라는 말은 그물의 코를 꿰어 그물을 잡아당기거나 놓아 풀 수 있게 한 동아줄을 말한다. 예문으로는 ‘마치 투망으로 고기를 싸 놓은 꼴이 아니고 뭐냐? 이렇게 싸 놓은 고기라면 벼리 당기는 일만 남았는데……’를 들 수 있겠다. 이와 달리 일이나 글의 뼈대가 되는 줄거리를 뜻하기도 한다. 나아가 단어의 자의(字意)는 그물이 벼리를 이탈할 수 없듯이 인간이 필수적으로 지켜야 할 기본적인 도덕과 규범을 뜻하기도 한다. 망망대해에서 그물코의 성글지 못함보다, 굼실대는 물결의 일렁임보다, 내 기필코 잡아채려는 정어리보다 중한 건 ‘벼리’를 가늠하는 것이다.
한여름 무더위를 견뎌내면서도 격(格)을 지키고자 한 우리네 조상은 무척이나 지혜롭다. 늘쩍지근한 한복과 끈적끈적한 살갗에 바람길을 열어두려 등등거리를 즐겨 착용했다고 한다. 이 또한 매듭 있는 그물처럼, 그 형상과 쓰임은 단단한 테두리에 의해 결정된다. 이렇듯 막연한 무언가를 건져 올리는 일과 구체적인 형상의 정확한 간극을 비워두는 일의 근본되는 이치는 동일하다. 가늠할 수 있는 테두리를 세우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 정해진 규격의 한코 한코를 꿰어가며 테두리에 이르러 맞춰 변형시키는 것이다.
작업을 함에 있어 ‘테두리’의 막연함을 논한 안종진 소장의 발제에 화답으로 시작된 글이니, 덧붙여 약간의 오지랖을 늘어놓아야겠다. 언제 적 천사이고, 언제 적 미래와 역사이고, 언제 적 진보와 폭풍이며, 언제 적 고뇌와 우수인가? 그 시대로부터 백 년이 흘렀건만 우리는 아직도 중심의 상실에 망연자실하고 있는가? 본디 중심은 부재했다! 아니, 모든 곳이 중심이다. 함께 ‘이곳, 이 땅’의 현실에 발붙여 우리 이야기로 살아내기를 노력하세. 곁에 둔 일상을, 궤도를, 형식을, 구속을 살아내지 않고서는 그 어떤 변화와 변혁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는 알잖는가? 다시, 문제는 리얼리즘일 뿐이다. 달걀 속의 들끓는 고요가 없이 어떻게 닭이 소리쳐 신새벽을 알릴 수 있단 말인가.

말의 난장(亂場)에서
그간 작업을 핑계로 돌아보지 못했던 여러 자리에 나를 앉혀보고 있다. 물리적으로 구상하는 일에서 일정한 거리를 둔 그곳은 난무하는 ‘말’과의 다툼이고 또 화해의 장소이다.
‘그때의 말’이 ‘지금의 말’을 만나고,
‘지금의 말’이 ‘그때의 작업’을 포장하기도 하며,
‘그때의 작업’과 ‘그때의 주체’에 ‘지금의 말’이 덧붙여기도 한다.
이처럼 특정한 작업에 대한 해석은 모든 사람에게, 모든 순간 열려 있다.
1. 말과 말이 만나는 곳
그야말로 난장이고, 자리다툼이다. 담론을 선점하기 위한 전장 속에서 오롯이 ‘그때 나의 말’을 전달하기란 쉽지 않다. 펼쳐졌던 생각은 ‘각자의 지금 말’에 미끄러지고, 누군가에 의해 ‘선점된 혹은 선정된 말’에 폭력적으로 포섭되기도 한다. 의도와는 다르게, 말은 말 위에서 비껴 간다.
2. 말과 작업이 만나는 곳
누군가의 작업에 스포트라이트가 비친다. 하지만 곧 쏟아내는 말들 속에서 핀 조명의 조도는 잦아들고, 작업은 그 말들의 호명에 따라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옮겨 다닌다. 마치 본디 정해진 제 자리는 없었다는 듯, 말 속에서 작업은 유영한다.
3. 말과 작업 주체가 만나는 곳
작업과 작업 주체를 구태여 나눌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창작의 맥락과 내용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이들은, 작업을 탐닉하며, 곧 ‘상상된 imagined 작업자’를 호출한다. 그리고 말한다. “너의 자리는 여기가 아니라 저기 아니었느냐?” 그 말은 저기 눅진 곳으로, 주체의 등을 떠민다.
이 세 가지 양태는 분리되어 일어나기도, 동시에 겹쳐 터지기도 한다. 나처럼 글로 생각을 정리하는데 익숙한 사람에게 이 중 가장 어렵고 난망한 건 첫 번째, ‘말’과 ‘말’로 점철된 사고(思考 또는 事故)의 전장이다.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말 앞에서 글의 리듬은 무력하고, 나는 어느새 포위되어 끌려가거나, 도망치듯 생각을 다른 세계로 숨기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의 부딪침은 지금의 나에게 꼭 필요한 과정이다. 담론을 나누고, 실천적 지혜를 발전시키기 위한 훈련. 그 말의 농도와 강도를 조절하려면 무엇보다 ‘내 생각’을 분명히 하고, 스스럼없이 꺼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글이 아닌 ‘말’로. 끝내 미끄러져 질문만 남을지라도.
진정한 주체는, 결국 타자 속에서 발견되는 것 아닐까.
누구라도 불편한 세로쓰기
___ 새 문서를 열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텍스트의 흐름을 가로가 아닌 세로로 바꿔보자 마음먹은 오늘. 그 낯선 움직임은 한 장의 글이 아닌, 건축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돌아보게 했다. ___
다시 ‘새문서 만들기’를 클릭하고 잠시 망설인다. 명조와 고딕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가끔은 아주 가끔은 재기 발랄함을 보여주려 굴림을 고르기도 하지만, 오늘은 세로쓰기 하나를 더한다.
텍스트를 상징하는 ‘T 아이콘’을 살펴보니 아래로 향하는 화살표(↓)와 나란히 쓰인 ‘T’가 보인다. 한자씩 조심히 써 내려가니 한글의 자음과 모음은 그나마 자연스럽지만 문장부호와 알파벳은 어찌할 바를 모르며 춤을 춘다. 더욱 난감한 것은 커서와 엔터, 백스페이스의 예측 불가능한 움직임. 그들을 따라야 하는 나는 마치 이집트 상형문자를 쓰고 있는 듯한 생경함에 멀미가 인다. 머리로 뜻을 읽어내지 못함은 물론이거니와 두 눈 또한 글을 가로질러 연속된 선형으로 움직이지 못한다. 그림을 보듯 부분 부분의 파편에 초점을 맞추려 하지만 글이라는 것이 대단히 분명한 시각적 의도가 있는 것도 아니니, 눈은 구석구석을 정처 없이 헤집고 돌아다닐 뿐이다. 글은 우상에서 좌하로 채워져 가는데, 내 눈은 자꾸만 비워진 좌상에서 우하로 어그적거린다.
사정이 이러하니 명조는 고사하고, 세로쓰기에는 애당초 생각이 미치지 못했구나. 더하여 한가지 깨달음에 이르니 ‘아~ 이래서 선조의 옛글은 줄을 따라 논리에 순서를 더해가며 사고를 지글지글 끌고 갔던 게로구나’.
이 불편함을 나의 ‘화두’로 삼아보자. 우선 나의 관심은 전통도 아니고, 정체성도 아니고, 독창성도 아님을 밝혀 둔다. 이는 불필요한 논쟁을 피하기 위한 선 긋기다.
탈식민지도, 동아시아 근대화도, 건축보다 대단한 영조에 관한 관심도 아니다. 콘크리트로 목구조 지붕을 흉내 내기 위함도, 고상한 정신을 담아 현대적으로 재해석을 해보고 싶음도 아니다. 비워냄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적 채움도, 적절한 크기로 나눈 것을 채와 켜로 둘러대려 함도 아니다. 풍경 좋은 곳을 향한 창에 차경과 장경을 덧씌우기 위함도 아니다. 또한 그간의 오고 간 말들로 피투성이가 된 ‘한국적임’이 어렵지만 피할 길 없으니, 길가에 난무한 지금의 여기저기를 뽑기 놀이하듯 그중에도 극히 일부가 혹은 그 한 조각이 마치 우리의 진정한 현재로 한국성의 대안임을 주장하려는 바는 더더욱 아니다.
이도저도 버거운 와중인데, 바야흐로 ‘이제는 목구조의 시대가 왔다.’하여 재료와 구조의 근친성에 기대어 거리낌 없이 직설적으로 옮겨보려는 욕망은 더더욱 아니다.
그 모든 ‘아닌 것들’은 제외하고, 다시 명조로 돌아가 글을 매듭지어보자. 건축이 한 사회의 생산과 소비 활동이 추동시킨 문화적 산물이라면, 나에게 필요한 ‘한국성’은 건축산업의 여집합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것이다. 건축계가 여태껏 주장하고 논의해 온 것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둔 어딘가에 차집합으로 비어 있는 그곳. 나는 거기에 기대어본다.
나는 그저 명조를 명조답게 써 내려갈 때, 사고가 논리적으로 가능해져 이를 통해 무언가 생산적 일조를 하게 되길 바랄 뿐이다. 그 과정이 공동체에서 논의되고 결과물로도 이해되는 모종의 형식으로 자리 잡길 기대할 따름이다. 그리하여 언젠가 우리 건축이 지구 문명 안에서 분명한 교집합을 이룰 수 있다면 – 그때야 비로소 나도 이 불편한 세로쓰기를 해야만 하는 지금의 심리적 부담과 답답함을 편히 내려놓고, 다시 가로쓰기에 관심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세로쓰기는, 새로쓰기보다 어렵다. 지금은 누구라도 그럴게다.

작은 돌 하나를 기워 올리는 마음으로
__ 이화여대 강연을 준비하며
특강을 요청한 이화여대 이윤희 교수의 요청은 단순했다.
“정해진 형식은 없지만,
학생 때 이상적인 건축의 방향을 어떻게 정하고 그 길을 걸었는지,
그리고 꾸밈에 치우친 학생들에게 ‘만드는 것’에 대한 탐구를 전해주면 좋겠어요.”
막막함이 밀려왔다. 그리고 이어진 자문. ‘과연 내가 강연을 해도 되는가’. 한편으론 솔직해질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도, 가면이 곧 정체성이라 믿으며 무한한 가능성을 드러내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텍토닉’이라는 굴레,
바슐라르의 격언,
earthwork과 roofwork의 유혹,
그리고 목구조의 필연성까지 –
머릿속은 복잡했지만, 조각들을 단순히 나열하는 방식은 역시 식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수진과 이전 특강자들의 이력을 훑어보았다. 사진 하나하나엔 작지만 중요한 포커스가 있었고, 경력은 매끈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나는 이들과는 결이 다르구나.’ 그들은 분명한 궤적을 따라 걸어온 사람들이었다.
나는 어떤 길을 걸어왔던가. 왜, 어떻게 이 자리에 당도했을까. 산산조각 난 생각의 파편들이 머릿속을 맴도는 새벽 4시. 나는 사무실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있었다. 조각난 시간이 쌓여 체화된 생각이 되었고, 그 흐릿한 생각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구나. 깊숙이 나 자신에게로 담가 보면, 그건 치유될 만큼의 생채기일까. 아니면 그마저도 나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할까.
두 페이지 분량의 낙서를 채우지 못하고, 이내 다른 생각에 잠겨 뒤척이는 건, 그건 어쩌면 일종의 병인지도 모른다. ‘나’를 제쳐두고 주변과 조직을 챙기려 여기까지 왔지만, 나도, 사무실도 뜬구름 같다. 불안정한 자아는 작은 파동에도 쉽게 요동친다. 여러 일들에 퉁겨지고, 몸과 마음이 축 늘어진 상태가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지는 요즘. 마흔이 넘은 지금에도 나는 실어증을 겪고 있다. 그간 내뱉은 말과 글, 만들어낸 작업들은… 대체 무슨 의미였을까.
꽁꽁 숨어있는 저 깊은 곳, 작은 돌멩이 하나를 부여잡고 다시 우물 위로 올라와 거친 숨을 연거푸 내쉴 수 있다면… 그 돌멩이 하나를 이제라도 찾고 싶다. 기워 올리자. 분명, 작은 돌 하나는 존재한다.
‘달의 행로를 바꿀지라도.’
[이 조각난 문장들 속에서, 나는 그들에게 어떤 ‘만드는 이야기’를 전할 수 있을까.
학생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정리된 길’이 아니라 ‘조각난 신념의 고백’일지도 모르겠다.]